[그리스 고전문학기행]레스보스섬의 「사포」

입력 1997-03-26 08:25수정 2009-09-27 01:28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사포
오랜 터키의 지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지리적으로 터키에 훨씬 더 가깝기 때문일까. 레스보스는 그 풍기는 분위기가 그리스적이라기 보다는 터키적이다. 터키와 페리나 배의 왕래가 빈번하지만 그리스에서는 아테네 인근의 피레우스 항에서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선박편으로 히오스 섬에 가 다시 갈아타야만 하는 교통의 불편함도 있다. 섬의 중심지라 할 조그마한 미티릴니읍의 귀금속점이나 보석세공점 가구점이 그렇고, 가게에 나른하게 앉아 홍차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고, 조금만 교외에 나가면 듬성듬성 한 올리브숲 아래에서 한가하게 풀을 뜯는 양떼의 모습이 그러하다.

레스보스,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의하면 음란한 여인들이 사는 에게 해의 한 작은 섬이다.

여성 동성연애자로 알려진 그리스의 대 서정시인 사포(BC 612∼557)가 태어나서 자라고 이로부터 레즈비언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보들레르는 그의 시 「레스보스」에서 이섬을 미와 사랑의 성지(聖地)로 그린 바 있다. 그러나 겨울철이라서 그런지 레스보스는 어떤 난잡함도, 들뜬 분위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가롭고 차분한 전원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그러한 곳이었다. 사포의 탄생지라고 하나 그에 대한 유적은 더더구나 아무것도 없었다. 사포를 느끼기 위해서라면 파옹으로부터 실연을 당해 그가 바다에 투신 자살했다고 전해지는 이오니아 해의 로이카스섬으로나 가보아야 할까.

사포가 묻힌 그의 고향 레스보스 섬에 그리스 신화의 주인공 오르페우스의 무덤도 함께 있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신화에 의하면 오르페우스는 바쿠스 신의 광기에 사로잡힌 여인들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하고 시신이 이곳 레스보스 섬에 버려져 묻혔다고 한다. 인간 가운데 최초의 가장 빼어난 음악가, 감동적인 십현금의 연주로 명부의 신 하이데스를 감동시켜 독사에게 물려죽은 아내 에우리티케를 살려내는데 성공한 생의 구원자, 신의 명령을 어김으로써 아내를 다시 잃게되자 세상을 버리고 마침내 생명조차 덧없이 포기해버린 사랑의 순교자….

오르페우스는 사실 현실의 인간, 사포의 신화적 반영이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 음악은 곧 서정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시는 노래의 가사였으며 그것은 십현금의 반주로 불렸다. 그러므로 인생과 사랑의 빼어난 시편을 써서 그것을 현금에 맞추어 노래하고 사랑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던 사포의 일생은 오르페우스의 그것과 같다고나 할까.

서정시인으로서 사포의 위대성은 일찍이 시인이란 아무짝에도 쓸모 없고 오히려 인륜에 해를 끼치므로 마땅히 이 세상에서 추방해야 된다고 주장했던 플라톤이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를 찬양한 시를 쓴데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아홉명의 뮤즈(음악의 신·그리스 신화에는 아홉명의 뮤즈가 있음―필자 주)가 있다고 전해지네/그러나 그들은 레스보스의 사포를 잊고 있네/열번째의 뮤즈를…」이라고 읊었다. 사포는 그 자신이 실천하고 후에 보들레르도 찬양했던 것처럼 바로 플라톤이 염려했던 도덕과 형식이라는 위선을 가차 없이 깨부수고 인생을 사랑과 본능이라는 진면목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자 하였다.

그와 같은 삶의 태도는 그녀가 동성애의 상대자라 여겨지는 자신의 여제자 아티스에게 「부드러운 침대위에서/팔과 다리에 향기로운 향유를 발라주었을 때/섬세한 너의 욕망은 만족했었지/우리가 함께 불러보지 않은 춤도 없었고/가보지 않은 신성한 사원도 없었지」(오자성 역)라고 노래한 「떠나는 아티스에게」, 그리고 그의 연인을 「가장 높은 나뭇가지 끝에서 익어가는/달콤한 사과처럼/과일을 따는 사람에게서 잊혀진/아니, 잊혀진 게 아니라/감히 팔이 닿을 수 없는…」존재로 노래한 그의 대표시 「처녀」 같은데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사포의 문학과 인생이 근대 자본주의 삶의 가식과 허구를 미학적으로 깨뜨리고자 했던 보들레르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을 것이다. 예상했던 것과 같이 그의 시는 당시 부도덕하다는 죄목으로 프랑스 법정에 회부되어 발표금지가 선고되었지만 보들레르는 시 「레스보스」에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율법들이 우리를 어쩌겠다는 건가?/다도해의 자랑인, 숭고한 마음씨의 처녀들아/너희 종교도 다른 종교 못지 않게 거룩하니/사랑이 지옥과 천국을 다 비웃겠지!」(박은수 역)라고 읊지 않았던가.

오세영(서울대교수·시인)

―끝―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