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62)

입력 1997-03-08 08:09수정 2009-09-27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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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지는 동안 〈17〉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그녀는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자리에 누운 지 이틀째 되던 날 그녀는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갔다. 의사는 처음 몸이 아프던 날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다. 엄마가 옆에 있어 그녀는 늦게까지 학교에 있었다고 했다. 『열감기예요. 요즘 여간 지독하지 않아요』 의사는 이가 흔들리는 것처럼 잇몸도 아프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묻자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며칠 병원을 나오는 것 말고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사흘 학교를 빠졌다. 토요일엔 수업이 없었지만 있었다고 해도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한번도 독립군은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에게 이 전화는 내가 받는다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그랬다. 처음엔 그런 그가 야속하다가 나중엔 그에게도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요일 낮에 기숙사로 전화를 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전할 수가 없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독립군의 말대로 용건은 전할 수 있지만 바꿔주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메모보다 본인에게 꼭 전해야 할 말이 있는데요』 그 말도 어렵게 했다. 『이곳에 학생이 마흔 명이 넘어요. 전화 오는 것마다 일일이 다 바꿔줄 수도 없고, 학생들 숙소와 사무실이 멀기도 하고』 그러면서 저쪽 남자는 「김운하 이 자식 요즘 늦게 다니고 하더니 연애 하나」하는 말을 마치 상대방 들으라는 듯이 혼자소리로 크게 말했다. 그러자 메모를 전하고 싶은 마음도 그냥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그대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한참 후 다시 전화를 하려다가 이번에도 저쪽으로 보내는 신호음이 들릴 때 그대로 끊고 말았다. 아까 전화를 받은 사람이 다시 받는다면, 그리고 다시 김운하를 찾는다면, 그 사람도 이쪽의 상대가 아까 먼저 전화를 걸다 중간에서 끊은 여자인 줄 알 것이었다. 정말 그는 이럴 때 왜 전화 한 통 주지 않는 것일까. 번호를 적어주며 이젠 운하씨 전화를 받고 싶을 때가 많아질 것 같다고, 일부러 그렇게까지 말해주었는데. 그가 전화를 걸어온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고 힘을 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주 월요일 그녀가 학교에 나갈 때까지 끝내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 사이 가을만 더 깊어진 것 같았다. <글: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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