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57)

  • 입력 1997년 3월 3일 08시 33분


가을이 깊어지는 동안 〈12〉 『비밀 번호?』 『일테면 이런 거요. 오늘 당장 나는 컴퓨터 통신의 키워드도 1004번으로 바꿀 거고, 통장 비밀 번호도, 컴퓨터 문서 비밀 번호도 1004번으로 바꿀 거고요. 이 다음 앞으로 우리가 우리집을 갖게 된다면 우리집 현관의 키워드도 1004로 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럼 비밀 번호도 아니네. 이미 내가 알아버렸으니까』 『그래야 운하씨가 문을 열고 들어오잖아요』 그 말이 그에게 어떤 기쁨을 주었을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자기도 모르게 기운이 다 빠져버린 것 같은 느낌 속에서도 지금은 그녀 마음 속의 기쁨만 가득했다. 이렇게 함께 손을 잡고 어깨를 기댈 수 있는 그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심으로 이 세상 모든 것에 감사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다. 이미 낮의 일 같은 건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의 고장난 오토바이에 대해서도 그녀는 잊고 있었다. 숲 속으로 난 오솔길 같은 산책로를 걸어 정문 쪽으로 나오다 그곳의 환한 불빛들과 마주치자 마치 그곳에 그동안 잊고 있었던 세상이 기다렸다는 듯 버티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잠깐만요』 그녀는 잠시 그를 붙잡았다. 『왜?』 『저 문을 나서기 전 해야 할 말이 있어요』 『무슨 말?』 『우리는 아직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지 않아요. 아주 막연하게 서로를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요.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를 잘 아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까도 그랬고요』 어깨 위로 노을이 밀려들 때, 숲길에서 한 입맞춤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다시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이제 서로 조금씩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 『우리는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얼마큼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우리 마음 속의 비밀 번호들 다요』 그녀는 그것을 우리가 저마다 다르게 살아온 날들과, 그런 날들에 뿌리를 내린 저마다 다른 생각들에 대한 이해라고 말했다. <글: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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