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56)

  • 입력 1997년 2월 28일 20시 24분


가을이 깊어지는 동안 〈11〉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어둠 때문에 온몸의 기운이 빠지는 건 아닐 것이었다. 마치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팽팽하게 가져왔던 어떤 긴장을 한순간에 놓쳐버린 듯 그렇게 두 다리와 어깨의 기운이 저절로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키스란 이런 것일까. 처음 그 느낌은 바람처럼 다가왔다. 그의 온몸을 휘감던 바람 한 줄기가 그의 입술을 통해 이쪽 입술로,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입술을 떼었을 때, 자신의 온 몸의 모든 것이 바람처럼 그렇게 빠져나가고 말았다. 한때 하석윤 아저씨를 마음 속으로 연모하던 시절, 아저씨가 소개하는 세계 명작 속의 수많은 키스 장면처럼 그것은 그렇게 불 같지도 격정적이지도 않았다. 다만 그 불씨 하나가 꽃씨처럼 그녀의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가야지, 이제』 한번 밀려온 다음 더 빠르게 층층이 밀려오는 어둠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어디로 가죠?』 그것조차 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눈 앞을 막아서기 시작하는 어둠처럼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밖으로』 아직 공원 안이라는 이야기였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살며시 손에 힘을 주며 그녀의 팔을 자신 쪽으로 당겼다. 걸으면서 그녀는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발밑에서 일찍 떨어져 말라버린 낙엽들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나무에 달린 같은 나뭇잎도 저마다 떨어지는 시기가 달랐다. 낮이라면 아직 푸른색을 그대로 띤 잎들이 어둠에 눌리며 하늘을 가렸다. 그녀는 어둠 속에 마치 아까 오던 길에 잃어버린 무엇을 찾듯 그의 손을 잡은 채 발밑을 보고 걸었다. 지난 여름, 발밑에 사각거리는 이 잎들이 하늘에서 무성할 때 이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한 계절이 바뀐 지금 그에게 입술을 주었다. 『지금 나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 어쩌면 그녀는 무슨 말인가 해야 할 말을 찾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하는데?』 손을 잡은 채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오늘이 며칠이죠?』 『10월4일. 화요일이고』 『1004. 이제 그 번호를 내 삶의 비밀번호로 하기로 했어요』 <글: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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