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44)

  • 입력 1997년 2월 16일 19시 53분


독립군 김운하〈15〉 『다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어떨까요? 그 여자에게 말이죠』 한동안 탁자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위쪽을 향해 별처럼 떠올랐다. 그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렇게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달라지겠지요』 『편지 같은 것도 오지 않았나요?』 『예. 그 여자는 단지 그를 잊고 싶어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를 잊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자기를 몰았던 것 같고요. 이해는 해요. 다시 오지 않는 여자를 보면서…』 뒤늦게야 독립군이 의자 등받이 쪽으로 등을 늘리듯 길게 몸을 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르겠군요.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자주 만날 거니까요』 아무리 담담한 얼굴로 담담하게 말해도 이럴 때 여자의 눈은 깊어야 한다. 그리고 남자도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라는 걸 알아서 헤아려주어야 한다. 심각하지도 경박하지도 않은 그 어떤 말로. 『진작에 그 말을 해주지 그랬어요. 그러면 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물어봤어요. 독립군 아저씨도 연애를 해 봤느냐고』 『그러니까 하는 얘깁니다. 자주 만날 사람에겐 할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사실.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고. 구분한다면 오히려 슬픈 이야기지』 『그렇지만 만약 거절해서 다음에도 그 여자가 또 찾아왔다면 그건 더 슬픈 일이잖아요』 『이제 내가 물어봐도 돼요?』 독립군이 의자 등받이에 댔던 등을 떼며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렸다. 『뭘요?』 『똑같은 질문을 내가 서영씨에게요』 잠시 그녀는 아저씨에 대한 생각을 했다. 독립군과 밤을 새우고 잠을 잤던 그 여자처럼 깊게 아저씨를 사랑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기엔 아저씨가 너무 늦게 그녀 앞에 나타났다가 너무 일찍 그녀 곁을 떠났다. 어쩌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아저씨가 떠난 다음 그녀 몫으로 그녀 가슴속에 간직된 어떤 안타까움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지금까지는 슬픈 기억의 서랍을 매일 하루의 일과처럼 열어봤다. 그러나 이제 그 서랍은 예전처럼 자주 열어보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남자에게 그 서랍을 열어보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 남자가 내게 그 서랍을 조금씩 조금씩 닫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글: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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