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22)

  • 입력 1997년 1월 23일 20시 34분


짧은 봄에 온 남자〈4〉 『아뇨. 오년이에요』 아저씨는 처음 편지를 썼을 때부터를 이야기했고, 그녀는 처음 아저씨의 기사를 읽던 열일곱 살 때부터를 이야기했다. 『오년?』 『예. 저한테는요』 아저씨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녀도 가만히 아저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건 느낌이었다. 그녀가 아저씨를 부끄러워하듯 아저씨도 그녀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서른다섯 살쯤 된 남자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는 게 서영은 조금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런 건 언제나 스물두 살된 자기의 몫인 줄 알았다. 『참…』 무슨 말을 하려다 아저씨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가만히 마주 앉아 아저씨의 말을 기다렸다. 『서영양의 이름을 부르려다 문득 말문이 막혀버렸어요』 그 말을 할 때 아저씨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 소년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편지로 이름을 부를 때와 지금 마주 앉아 이름을 부를 때 느낌이 다르다는 이야기겠다. 아까부터 이름 뒤에 줄곧 「양」자를 붙여 불렀던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괜찮아요. 그냥 서영이라고 불러주세요』 『낯설지 않아야 하는데, 막상 마주 앉아 이야길 하니 모든 게 낯설군요』 『이제 말도 놓으시고요』 『익숙해지면…』 만나면 긴 이야기를 하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왠지 아저씨가 자기를 어려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묻고 싶은 게 많아도 묻지 못했다. 파리에서의 생활도 묻고 싶었고, 귀국한 다음의 생활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마지막 편지에 아저씨가 말한 그 두 가지의 「지리멸렬」이 무슨 뜻인지. 서영은 그동안 아저씨가 보낸 편지들을 하나하나 떠올릴 수 있다. 아저씨가 어떤 기분일 때 어떤 말들을 했는지. 지금도 아저씨가 무슨 말인가 하면 그 말에 이어 아저씨가 한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금방 이야기가 멈춰지고 말았다. 무엇이 이런 침묵을 가져오게 하는 것일까. 『이제 올라가봐야 할 것 같아. 하던 일도 있고…』 아저씨가 먼저 일어서자고 말했다. <글:이 순 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