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동아/8월1일] “40초만 버텨라”…양정모 해방 후 첫 올림픽 금메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일 17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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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시상식에서 금메달 단상에 오른 양정모 선수(가운데). 동아일보DB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시상식에서 금메달 단상에 오른 양정모 선수(가운데). 동아일보DB

-정모야, 1분 남았다.
-금이야, 금메달이란 말이야.
-절대로 무리하지 말고 40초만 더 버텨라.

1976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8면 기사는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울부짖음으로 시작된다. 40초 뒤 결과는 10 대 8 패. 잠시 뒤 패자의 손이 들려졌다. 금메달이었다. 벌점이 가장 적은 사람이 이기는 경기 규칙에 의한 것이었다. ‘금메달이니 절대로 무리하지 말라’는 코치진의 외침은 그래서였다.

8월 1일 새벽,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에서 양정모가 거머쥔 ‘건국 후 첫 금메달’(동아일보 8월 2일자 1면 톱기사 제목) 소식이었다. 8월 2일자 2면 사설에선 이날의 감격을,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마라톤 손기정 선수와 비교했다.

‘그날 겨레는 손기정의 울음에 따라 울었고 심지어는 그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내야 했다. 그로부터 40년, 이제 우리는 일장기를 지울 필요 없는 떳떳한 태극기 아래서의 첫 금메달을 거둬낸 것이다.’

양정모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 소식을 전한 1976년 8월 2일자 동아일보 1면.
양정모 선수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 소식을 전한 1976년 8월 2일자 동아일보 1면.

부산에서 나고 자란 양정모는 중학 2학년 때 레슬링을 시작했다. 부산 중구 동광동 40계단을 오르내리며 체력을 키웠다. 세계주니어선수권에서 입상하는 등 주목받는 레슬링유망주였지만 1972년 뮌헨 올림픽을 앞둔 국가대표 선발전을 1위로 통과하고도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했다. ‘소수정예 파견 방침’ 때문이었다. 이에 반발해 매트를 떠났던 그는 1년 뒤 주위의 설득으로 돌아온 뒤 투지를 불태웠다. 부족한 스피드를 보완하기 위해 15㎏무게의 웨이트재킷을 입고 8㎞ 거리를 주2회 왕복하는 고된 훈련을 이겨냈다.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기까지의 과정은 그렇게 험난했다.

우리나라 레슬링은 그간 올림픽에서 금메달 11개, 은메달 11개, 동메달 14개를 획득했다. 특히 지난해 리우 올림픽 때 김현우는 부상과 예선에서의 오심 논란을 넘어 동메달을 따내 찬사를 받았다. 양정모의 후배들의 땀과 노력은 이렇게 결실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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