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째 무명 골리, 또 하나의 든든한 ‘평창 방패’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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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IIHF 세계선수권 MVP 한도희
선수 기근에 11세때 첫 태극마크… 세계적 선수 신소정에 가렸지만
이번 대회 4경기서 단 3실점

아이스하키를 하던 오빠(하이원 한건희)를 따라 취미로 스틱을 잡았던 초등학교 5학년 소녀는 2005년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에 뽑혔다는 거였다. 엄마 손을 잡고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가긴 했다. 경험을 쌓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지만 진짜 국가대표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부모님 품을 떠나 서울 태릉선수촌에 입소한 11세 소녀는 낯선 환경에서 한 달 내내 울기만 했다. 열 살 넘게 나이 차가 나는 동료 언니들은 소녀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소녀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국가대표가 됐다.

한국 아이스하키 역사상 최연소 국가대표였던 그는 한국의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여자세계선수권대회 디비전2 그룹A(4부 리그) 5전 전승 우승의 주역이 됐다. 대회 최우수선수(MVP) 및 최우수 골리상을 차지했다. 어느덧 소녀에서 숙녀가 된 한도희(23·사진)다.

13년째 태극마크를 달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무명이다. 주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른바 ‘세컨드 골리’(두 번째 골키퍼)다. 그의 앞에는 세계적인 골리로 평가받는 신소정(27·뉴욕 리베터스)이 있다. 신소정은 미국여자프로아이스하키리그에서 뛰는 유일한 한국 선수다.

10년 넘게 국가대표였지만 한도희가 공식 경기에 출전한 횟수는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신소정이 자리를 비웠거나 부상 중일 때, 아니면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있을 때 정도만 경기에 나갔다. 내년 평창 겨울올림픽의 전초전으로 치러진 이번 대회의 주전 자리 역시 신소정의 몫이었다. 하지만 대회 직전 신소정이 오른쪽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마침내 기회가 왔다.

한도희는 첫 경기였던 슬로베니아전을 시작으로 북한전까지 4경기 동안 한국의 골문을 든든히 지켰다. 한국이 19골을 넣는 동안 3골밖에 허용하지 않았다. 경기당 실점률은 0.75점밖에 되지 않는다. 마지막 네덜란드전에서는 신소정이 무실점으로 골문을 지켰지만 대회 MVP는 한도희의 몫이었다. 한도희는 “돌이켜 보면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정말 열심히 운동했는데 보여줄 기회가 없을 때 좌절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더 열심히 해야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한도희의 성장으로 한국 여자 대표팀은 신소정-한도희라는 두 개의 든든한 방패를 앞세워 평창 올림픽을 맞을 수 있게 됐다. 개최국 자격으로 올림픽에 자동 출전하는 한국은 본선 B조에서 스웨덴(5위), 스위스(6위), 일본(7위) 등과 맞붙는다. 한도희는 “남들이 보기엔 1승이 우습게 보일지 몰라도 우리의 현실적인 목표는 1승이다. 일본은 꼭 잡고 싶다”고 했다. 대표팀의 분위기 메이커이기도 한 그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혹시 아나요. 일본을 이기고 나면 또 다른 기적이 기다리고 있을지.”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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