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0년 생각했는데 어느덧 18년 더 뛰고 싶지만 몸이 바보가 돼 있었다 젊을 땐 필드서 뛰고 싶다는 이루지 못할 꿈도 대전 떠났지만 전북이 불러줘서 행복했다 김병지 형은 GK 후배 이끌어준 마부같은 존재 2002월드컵 태극마크…난 운 좋은 사람 이제 골키퍼 코치, 새로운 꿈을 꾼다
전북, 상주전 6골 폭발…은퇴 최은성 승리로 배웅
K리그 클래식(1부리그)의 큰 별이 영욕으로 점철된 그라운드를 떠났다. 이제 더 이상 땀 젖은 유니폼을 입은 그를 볼 수 없다. ‘영원한 수문장’ 최은성(43·전북현대)이 정든 골키퍼(GK) 장갑을 벗었다. 20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전북과 상주상무의 정규리그 16라운드는 한 선수를 위해 펼쳐졌다. 최은성을 위한 무대였다. 그가 선발 출전해 무실점으로 마친 전반 45분이 하이라이트였고, 하프타임 은퇴 행사는 또 다른 출발을 알리는 이벤트였다.
전반 17분 이동국의 첫 골 직후, 후배들은 골 세리머니 대신 하프라인에 모여 이날 경기를 끝으로 은퇴하는 큰 형님을 헹가래쳤다. 최은성은 웃기만 했다. 후배들의 축하 메시지 영상을 볼 때도, 양 팀 관계자와 서포터스로부터 꽃다발을 받을 때도 미소 지었다. 딱 한 번 울컥한 순간은 가족에게 감사의 말을 전할 때. GK 장갑을 벗으며 “홀가분하다”고 외치면서도 가족에게만큼은 뭐든 미안한 평범한 가장일 뿐이었다.
대전 시티즌(챌린지·2부리그)과 전북을 거치며 18년간 그가 지켜온 골문은 든든했다. 또 한결 같은 성실함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됐다. 올 시즌 전반기를 플레잉코치로 보낸 그는 이제 ‘정식 GK 코치’로 제2의 축구인생을 연다. 스포츠동아는 전북 구단이 최은성의 은퇴를 공식화(9일)한 직후, 전주 시내의 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 마지막까지 ‘성실맨’으로!
-한 팀에서 오래 뛰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맞다. 2011시즌을 마치고 대전을 떠나야 했을 때는 심란했다. 처음은 아니었지만, 가장 진지하게 은퇴 고민을 한 시기였다. 다행히 전북이 손을 내밀어줬다. 내 나이 마흔인데. 새파란 젊은 선수도 아니었는데 러브 콜을 보내주다니, 놀라웠다. 나보다 가족들이 더 행복해했던 것 같다. 함께 밥을 먹다가 눈물을 보일 정도로 전북에 고마워하더라.”
-행복한 사람이었다.
“정말 그렇다. 1997년 프로 데뷔 때만 해도 ‘딱 10년만 프로 생활을 하자’가 목표였다. 그 때 ‘모든 걸 내려놓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웃음) 강산이 2번쯤 바뀌고 있는 지금껏 있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은퇴 행사도 못 받는 이가 얼마나 많은데.”
-은퇴 선언을 하니 어떤가.
“마음이 너무 편했다. 더 이상 극심한 긴장과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게임 준비하며 신경이 곤두서지 않아도 되니까. 오랜 짐을 내려놨다고 생각하니 전혀 슬프지 않고, 오히려 홀가분했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다.”
-정확히 은퇴를 결정한 이유를 듣고 싶은데.
“딱 하나다. 거짓 없는 몸 때문이다. 겉보기엔 멀쩡하지만 어느날 보니 손가락이 짝짝이고, 잘 붙지도 않더라. 작년부터 볼을 찰 때 멀리 나가지 않는다는 느낌도 있었다. 30대 중반이라면 플레잉코치 역할도 제대로 했을 거다. 이젠 아니다. 운동을 해도 무거웠고, 컨디션도 그대로더라. 더 뛸 순 없었다. 민폐 아닌가.”
최은성은 월드컵 휴식기를 앞둔 5월 무렵, 전북 최강희 감독과 은퇴에 대해 처음 상의했다. 진지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러다 우연한 최 감독의 한마디에 마음을 먹었다. “은성이도 서서히 지도자 준비를 해야 하고….” 대답은 금세 나왔다. “정말 고맙습니다. 제대로 할게요.” 전북은 큰 선물을 마련했다. 치열한 순위싸움 와중에도 과감히 상주전 교체카드 한 장을 포기했다. 공식 축구경기 교체는 3회다. 전북은 하프타임에 GK를 바꿨으니, 교체카드가 2장이 전부였다. 최 감독은 “영웅을 위해 그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더 큰 걸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고, 상주 박항서 감독도 “우리 선수들에게 ‘봐주지 말고 강하게 공격하자’고, ‘슛을 때려라’라고 주문했다. 그게 영웅에 대한 진짜 예우”라며 2002한일월드컵 당시 함께 한 제자에게 갈채를 보냈다.
● 이젠 내려놓을 때!
-18년 프로 인생에 전혀 후회는 없나.
“운동하며 후회는 없었다. 아, 한 번은 있다. 잘못된 선택? GK? (웃음) 아마, 모든 골키퍼가 그럴 거다. 막연히 필드에서 뛰고 싶다는 갈망 때문에 대학(인천대) 때 필드 플레이어 전향을 고려한적은 있다. 대전에서 마무리하지 못하고 나간 건 아픔이긴 하다. 그래도 그게 운명이었다. 대전에도 늘 고마운 마음이다.”
-우승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것도 마음 한 구석의 빈 자리인데, 어쩔 수 없는 건 털어버려야지. 내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아쉬움이 있기에 더 열심히 살 수 있지 않았겠나. 이젠 지도자로 우승트로피를 한 번 들어보련다.”
-자신에게 김병지(44·전남 드래곤즈)란?
“왜 그 질문이 없나 했다. (김)병지 형은 우리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마부다. 안내자였고, 인도자였다. 우린 항상 형을 따라가려 했고. 한 번도 형을 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솔직히 기록에 심드렁한 것도 있다. 언젠가 (최강희) 감독님 손님 분이 내게 물어보더라. ‘몇 경기 뛰었냐’고. 정말 내 기록을 몰랐다. ‘한 500경기쯤 뛰었다’는 답을 했던 것 같다. 대전에서도 400경기를 앞두고 후배들이 ‘형님, 이제 몇 경기 남았어요’란 말을 해줄 정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이 들고 후배들의 앞길을 막는다는 생각은 없었나.
“아니, 많이 들었다. 후배들이 날 얼마나 원망했겠나. 그래도 내 앞에서 함께 웃으며 뛰어줬으니 고맙다. 그간 후배들과 경쟁하는걸 솔직히 즐겨왔던 것 같다. 한 시즌 끝내고 다음을 준비하면서 땀 흘릴 때, 후배들에게 지기 싫어서 더 열심히 몸을 날렸다.”
-롤 모델이 있었는지.
“지금은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GK 코치로 활동하시는 정기동 선배다. 1984년 포항제철중의 창단 멤버로 입학했을 때, 포항의 주전 수문장으로 뛰는 정 선배를 보며 홀딱 반했다. 그 분 플레이를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2002년 월드컵에서 미국 GK로 나선 프리델을 보면서 또 한 번 제대로 배웠고.”
프로선수로 532경기(K리그만 포함)에 나선 최은성이지만, 태극마크와는 거리가 멀었다. 2002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중 한 명이었음에도 A매치 출격 횟수는 한 번이다. 2001년 9월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2-1 한국 승)이 처음이자, 마지막 A매치였다. 16차례 대표팀에 소집됐지만 항상 그의 자리는 벤치였다. 역시 아쉬움은 없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대답은 한결같았다. “난 운이 좋은 사람이다.” 왜냐고?
“12년 전 난 31세였다. 30세 넘어 무슨 대표선수인가. 2002년 최종엔트리 발탁 사실도 한 지인의 연락으로 뒤늦게 알았다. 당시 GK 후보군이 꽤 쟁쟁했다. 꿈도 못 꿨는데, 4강을 현장에서 지켜봤으니…. 그래도 ‘오늘과 지금에 충실하자’는 내 좌우명이 지금의 최은성을 만들어줬다. 이 말도 꼭 넣어줬으면 한다. ‘전북맨’으로 떠났고, 앞으로도 ‘전북 코치’로 남겠지만, ‘대전 맨’이었던 그 시절을 잊지 않고 있다고. 대전 서포터스, 대전 구단 옛 사무국 직원들 모두에 감사드린다고.”
최은성은? ▲생년월일=1971년 4월 5일 ▲키·몸무게=184cm·82kg ▲출신교=성내초∼포항제철중∼강동고∼인천대 ▲프로 경력=대전 시티즌(1997∼2012년 3월·464경기 603실점 1도움), 전북현대(2012년 3월∼2014년 7월 20일 은퇴·68경기 71실점) ▲A매치=1회(2001년 9월 나이지리아전) ▲국가대표 경력=2002년 한일월드컵(4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