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이상군, 전설의 제구력…“심판들에게 스트라이크존 가르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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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20일 07시 00분


20세기 최고의 컨트롤 투수였던 이상군 한화 3군 코치가 눈 쌓인 대전구장에서 옛날을 기억하고 있다. 유니폼을 벗은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군살 없는 몸매다. 대전|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20세기 최고의 컨트롤 투수였던 이상군 한화 3군 코치가 눈 쌓인 대전구장에서 옛날을 기억하고 있다. 유니폼을 벗은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군살 없는 몸매다. 대전|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20세기 최고의 컨트롤 투수…영원한 독수리

돌팔매질 자신있어 선택한 야구
공 한개차 자유자재 제구 마법사
마무리 캠프때 심판 상대 강습
투구수 적어 완투도 밥 먹듯이


빙그레 창단멤버로 에이스 활약
1996년 우승 못하고 강제 은퇴
연수후 코치 1년만에 현역 복귀
KS 제패·통산 100승 소원 풀어

20세기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피네스(finesse·기교) 투수. 21세기에도 이 같은 평가는 변함이 없을지 모른다. 그와 함께 야구를 했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처럼 컨트롤이 좋은 투수는 본 적이 없다”고들 했다. 1986년부터 제7구단으로 등장한 빙그레 이글스의 마운드를 지켰다. 1986∼1987년 2년간 무려 490이닝을 던졌다. 책임감과 희생정신이 몸에 밴 모범생. 고교·대학시절부터 그렇게 던져 ‘고무팔’이란 별명도 붙었다. 항상 아들의 이니셜이 새겨진 양말을 신고 마운드에 섰다. 세월이 흘러 그 아들과 딸은 대학졸업반이 됐다. 한창때는 몸쪽을 던지지 않고도, 아웃코스를 파고드는 면도날 같은 컨트롤만으로 타자들을 요리했다. 구단은 프로야구 최초로 개인성적과 관계없이 4년간 25% 연봉 인상을 보장하는 다년계약을 해줬다. ‘영원한 독수리’ 이상군(50)의 이야기다.

○심판에게 스트라이크존을 가르치다!

컨트롤에 대해 많은 전설이 있다. 심판에게 스트라이크를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이상군의 기억. “1987년 가을 마무리캠프 때였다. 김광철 심판위원장과 심판들이 창원의 캠프를 찾아왔다. 심판들의 훈련 때 김 위원장이 불렀다. 심판들이 원하는 대로 공을 던져줬다. 스트라이크존에서 공 한 개 차이로 넣고 빼고, 주문하는 대로 계속 던졌다.”

1986년 12승17패1세이브를 기록했다. 빙그레는 신생팀다웠다. 배성서 초대 감독이 투지를 불태웠지만, 29번의 1점차 패배를 당했다. 243.1이닝을 던진 이상군이 가장 많은 피해를 봤다. 상대 에이스와 붙어 2점 이상 내주면 패배가 확실했다. 17패를 기록한 이유다. 12승 모두 완투승이었다. 그해 무려 19차례의 완투경기를 했다. “제구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이 심판은 어디를 던지면 스트라이크를 주겠구나’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던져서 스트라이크를 잡는 재미가 컸다. 타자들도 내가 컨트롤이 좋다고 생각해 초구부터 쳤다. 완투를 해도 투구수가 120개 안쪽이었다. 힘 들이지 않고 던져서, 완투해도 문제가 없었다. 지금도 어깨나 팔에 이상은 없다.”

이상군과 함께 활동했던 이정훈의 기억. “외야에서 수비하면서 던지는 것을 보면 정말 대단했다. 주심의 팔이 여러 차례 움찔거렸다. 그만큼 심판들도 속을 정도로 컨트롤이 좋았다. 1986년의 공이라면 25승도 했을 것이다. 당시 빙그레의 수비와 방망이가 허약해서 그렇지∼.”

초창기 이글스의 에이스였던 이상군이 완벽한 밸런스로 공을 던지고 있다.(왼쪽) LG 김용수와의 선발 대결에서 승리해 개인통산 100승을 채운 이상군이 꽃다발을 들고 기뻐하고 있다. 스포츠동아DB
초창기 이글스의 에이스였던 이상군이 완벽한 밸런스로 공을 던지고 있다.(왼쪽) LG 김용수와의 선발 대결에서 승리해 개인통산 100승을 채운 이상군이 꽃다발을 들고 기뻐하고 있다. 스포츠동아DB

○축구와 야구 사이에서 결정한 운명

운동을 잘했다. 충북 증평 삼보초등학교에서 축구선수를 했다. 특별활동시간에 야구 테스트를 봤다. 던지기와 달리기를 시켰는데, 빼어난 실력의 그를 놓칠 리 없었다. “어릴 때부터 돌팔매질을 잘했다. 결국 야구를 선택했다.” 청주 우암초등학교로 전학해 본격적으로 야구선수가 됐다. 청주중 시절부터 에이스였다. 신일고, 충암고, 청주고 등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졌다. 최종 선택은 북일고. 김영덕 감독이 일본프로야구에서 선수생활을 했고 투수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부친이 정했다. 이상군은 김 감독의 조련 속에 지금과 같은 투수가 됐다.

1980년 이상군은 모교와 김 감독에게 첫 우승을 선사했다. 봉황대기였다. 사연이 있었다. 우승할 전력이었으나 매번 지역예선에서 탈락했다. 텃세 때문이었다. 김 감독은 예선탈락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고(故) 김종희 한국화약그룹 회장이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 맞이한 첫 대회였다. 이상군은 예선부터 결승까지 5경기를 다 던지며 우승을 이끌었다. 여세를 몰아 화랑대기까지 품에 안았다. “감독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가장 기억에 남는 우승이다. 그 뒤 그룹 본사로 인사를 갔다. 회장님께서 당시 고급이었던 전자시계 등을 선물로 주신 기억이 생생하다.”

○UDT 특수훈련 받은 1985년의 빙그레

한양대를 졸업하고 1985년 빙그레에 입단했다. 계약금은 4000만원. 노정호 사장이 현찰이 담긴 007가방을 부모님께 열어 보이며 사인을 받아냈다. 계약금은 모두 부모님께 드렸다. “이상군 덕분에 3명의 형은 한화그룹 계열사에 입사했다”고 20년 이상 그를 지켜본 주재근 전 한화 운영부장이 덧붙였다.

1985년 2군에서 시작한 빙그레의 훈련은 지독했다. 체력을 담당하는 박상조 코치. UDT 출신이었다. 구령소리에서부터 카리스마가 넘쳤다. 한 여름 다대포 해수욕장에서 벌어진 훈련은 지독했다. 모래밭에서 반복되는 PT체조. 선수들을 지옥 문턱까지 몰고 갔다. “백사장에서 양팔 벌려 뛰기를 300번 쉬지 않고 해보면 안다. 오리걸음, 토끼뜀 등 정말 힘들었다. 지금 그런 훈련을 하라면 요즘 선수들은 다 도망갔을 것이다. 훈련을 끝까지 다 받은 사람은 나와 김종문, 둘 뿐이었다.” 힘든 훈련에 반기를 들었던 주장 김호인은 배성서 감독에게 찍혀 진해 야구장 뒷산을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강제은퇴 후 복귀, 우승의 기쁨을 경험하다!

1988년 김영덕 감독이 부임했다. 팀 사정상 마무리로 전환했다. 10승3패16세이브를 기록했다. 처음 한국시리즈에 나갔다. 해태의 벽은 높았다. 1989년 성숙해진 빙그레는 페넌트레이스 1위를 차지한 뒤 해태와 한국시리즈 복수전을 꿈꿨다. 1차전에서 선동열과 선발 대결을 펼쳤다. 1회 이강돈의 솔로홈런이 터졌다. 이상군이 기막히게 던졌다. 4-0 승리. “프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다. 그 때가 가장 우승에 가까웠으나, 2차전에서 장종훈의 실책으로 역전패 당한 뒤 4연패로 무너졌다. 4차전에 선발로 나와 3회 이순철에게 홈런을 맞고 진 것이 아쉽다.” 김 감독은 우승의 한을 풀지 못하고 물러났다. 뒤이은 강병철 감독은 신인을 좋아했다. 1996년 강제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이상군은 1997년 시애틀 산하 더블A에서 연수를 받았다. 1998년 정식 코치가 된 지 1년 만에 다시 마운드에 섰다. 1999년 이희수 감독이 부임하면서 이상군의 절묘한 컨트롤이 필요했다. “대구 삼성전이었다. 복귀 이후 처음 마운드로 올라가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야구하면서 처음이었다.” 그해 빙그레는 마침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상군은 두산과의 플레이오프 4차전 승리투수였다. “2000년 4월 30일 LG 김용수와 선발 대결을 벌여 승리해서 딱 100승을 채운 뒤 자연스럽게 유니폼을 벗었다.”

그후 완전히 지도자로 변신했다. 2004∼2005년에는 LG 유니폼을 입었다. 밖에서 한화를 보고 싶었던 이유였다. 고향팀으로 컴백한 뒤에는 운영팀장으로 근무하면서 프런트 업무도 익혔다. 17개월의 프런트 생활은 가시밭길이었지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했다. 2013년부터는 3군에서 유망주들을 지도한다. 자신의 피칭처럼 야구인생도 깔끔하다. 진실로 사람을 만나고 은사 김영덕 감독 등 은혜를 베풀어준 사람들을 잊지 않는다. ‘스트라이크 인생’이다.

○이상군이 말하는 피칭이란?

“야구는 유니폼이 주는 매력이 있다. 투수는 무엇보다 멘탈이 강해야 한다. 요즘 야구는 예전에 비해 순수함이나 열정 등이 떨어진다. 선수들이 몸을 사린다. 상·하체의 균형이 잡힌 폼으로 던지면 몸에 무리가 없다. 컨트롤은 하체가 결정한다. 200개를 던져도 스트라이드 때 딛는 왼발의 위치가 항상 같았다. 던진 뒤 자세가 나쁘면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타자를 맞혀 잡는다는 마음으로 항상 땅볼을 유도했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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