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록神의 재림… 구원받은 첼시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5월 21일 03시 00분


퇴출설 드로그바 동점골-승부차기 끝내기골… 107년 만에 챔스리그 첫 우승

신(神)이라 불리던 검은 얼굴의 사내는 주문을 외우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자신이 찰 공을 놓았다. 4년 전 바로 이 순간, 빗속에서 엄청난 중압감을 느끼던 그의 동료는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미끄러지면서 실축한 바 있다.

모든 것이 걸려 있는 순간이었다. 7만 관중과 전 세계 2억 명이 넘는 시청자가 지켜본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지도 않았다. 보통 승부차기 키커들이 서너 걸음 뒤에서 달려오면서 강한 슛을 날리는 데 비해 그는 거의 제자리에서 휘슬이 울리자마자 주저 없이 공을 날렸다. 아주 간단히 툭 찬 듯한 공은 4강전에서 무적함대 레알 마드리드의 간판스타들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던 ‘영웅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를 피해 들어갔다. 그 자리가 주는 중압감에 비해 너무나 손쉽게 찬 듯한 킥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됐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가 창단 107년 만에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첼시는 20일 독일 뮌헨 알리안츠 경기장에서 열린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에른 뮌헨과의 결승전에서 전후반과 연장전을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4-3으로 이겼다.

‘드록신(神)’ 디디에 드로그바가 마지막 슛을 성공시키는 순간 뮌헨 선수들은 신이 내린 형벌을 받는 듯했다. 첼시 선수들이 무려 1시간여에 걸쳐 운동장을 돌며 기뻐 날뛰는 동안 뮌헨 선수들은 깊은 죄책감과 패배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잔디밭을 뒹굴었다. 서로를 위로하지도 않았다. 그만큼 여러 실수를 저질렀다. 뮌헨은 후반 38분 토마스 뮐러의 헤딩골로 선제골을 뽑았으나 후반 종료 2분 전 드로그바에게 헤딩골을 허용해 동점골을 내줬다. 이날 경기는 슈팅 수 24-6, 코너킥 20-1로 뮌헨이 압도했다. 그러나 뮌헨은 단 한 번 내준 코너킥에서 실수를 했다. 드로그바는 수비 뒤쪽 먼 거리에서 거의 90도에 가깝게 공의 방향을 바꾸며 환상적인 골을 터뜨렸다. 더욱이 뮌헨은 연장 전반에 얻은 페널티킥을 그토록 믿었던 간판스타 아르연 로번이 실축했다.

승부차기에서 뮌헨은 골키퍼 노이어가 상대의 첫 골을 막아낸 뒤 직접 키커로 나서 골을 성공시키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그러나 첼시 골키퍼 페트르 체흐의 운이 더 좋았다. 뮌헨의 4, 5번 키커가 잇달아 실축하며 첼시는 승부차기에서 3-2로 뒤지다 4-3으로 역전했다.

첼시 구단주인 러시아 석유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2003년 팀을 인수한 뒤 간절히 원하던 챔피언스리그 트로피를 손에 넣었다. 챔피언스리그 우승 조급증이 있던 그는 그동안 1조2000억 원을 투자하고 9년간 6명의 감독을 갈아 치웠다. 첼시는 깊은 분열 끝에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감독을 경질하는 등 극도의 위기를 겪었지만 로베르토 디 마테오 감독대행 체제로 기적의 행진을 펼치며 우승했다.

극단적 수비전술을 쓴 첼시는 ‘추잡하다’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어쨌든 챔피언이 됐다. 첼시는 4년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결승 승부차기에서 주장 존 테리가 미끄러지며 실축해 우승을 놓쳤던 악몽을 씻었다.

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드록바#첼시#승부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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