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아들 손잡고 은퇴하던데, 우리 준혁인…”

동아닷컴 입력 2010-09-16 07:00수정 2010-09-16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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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아들의 등에 업혔다. 언제나 늠름하기만 했던 아들의 등은 예상보다 더 넓고 따뜻했다. 15일 대구구장. 은퇴를 앞둔 삼성 양준혁의 아버지 양철식 씨가 든든한 아들에게 몸을 맡겼다. 40년동안 늘 아버지의 자랑이었던 막내아들이었다. 양씨는 “아들에게 처음 업혀본다”며 마냥 환하게 웃을 뿐. 프로 18년 인생의 땀이 배인 그라운드에서 아버지를 업고 선 양준혁 역시 따뜻한 미소로 화답했다.
이젠 노총각 아들에 결혼이야기도 못 꺼내
자기도 노이로제 걸린 모양입디다

전, 자식 잘 둔 덕에 대구의 유명인사
택시 타도 기사들이 알아봐 주죠

통산최다안타 통산홈런…
준혁이가 기록 몇 개 갖고 있지요 하하
“내 유일한 소일거리는 야구장 와서 아들 야구하는 거 보는 거였는데, 이젠 암만 해도 그런 낙이 없을 것 같소. 무덤덤해 지려고 해도 마음이 허전해요.”

‘프로야구의 살아있는 역사’ 양준혁(41·삼성). ‘거꾸로 잡고도 3할을 치던’ 그 위풍당당한 방망이를 이젠 내려놓아야할 시점이다. 19일 대구구장 SK전에서 팬들과 작별의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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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신(梁神)’ 양준혁. 과연 아버지는 아들의 은퇴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15일 대구구장에서 만난 양준혁의 부친 양철식(75) 씨는 아직도 아들의 퇴장이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양 씨는 은퇴식에서 아들을 타자로 세워놓고 시구를 할 계획이다.○지독한 가난, 아들 글러브 사준 건 딱 2번뿐

우리네 아버지 세대들이 그렇지만 양 씨 역시 젊은 시절 가난과 싸워야했다. 지금은 야구선수로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아들. 그러나 과거를 생각하면 회한부터 밀려오는 모양이다. “준혁이 할아버지는 나를 낳자마자 돌아가셨어요. 그러다보니 나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겠습니까. 준혁이가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한다고 해서 시키기는 했는데 장비 한번 제대로 사주지 못했어요. 야구 처음 시작할 때 글러브 하나 사주고, 그 뒤에 한 번 더 사줬나? 글러브 두어 개 사준 게 전부입니다. 왼손잡이 글러브를 구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었어요. 사촌형 양일환이 건국대 다닐 때 다른 왼손잡이 선수들 쓰다남은 걸 갖다주곤 했지요.”

양준혁은 야구를 할 수밖에 없는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작은 아버지 한장철과 앞서 말한 사촌형 삼성 양일환 코치가 야구선수로 성공하면서 자연스럽게 야구를 접하게 됐다. 한장철은 서울의 성남고로 스카우트돼 1967년 9월 12일 제21회 전국지구별초청 서울예선에서 서울상고를 상대로 퍼펙트게임을 기록했다. 해방 후 기록된 3번째 퍼펙트게임의 주인공. 이후 실업시절에도 명투수로 이름을 떨쳤다.

“작은 아버지 성이 왜 한 씨냐고 묻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 가족사가 좀 복잡하지요.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저한테는 아버지가 다른 동생들이 있어요. 장철이도 그런 동생이고. 준혁이가 초등학교 때 야구를 하겠다고 하도 고집을 피워서 장철이한테 일주일 동안 지켜보고 소질이 있는지 말해달라고 했어요. 소질 없으면 안 시키려고 했지. 야구선수 하나 키우는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갑니까. 그런데 동생이 ‘형님, 틀림없습니다. 야구 시켜도 되겠습니다’ 하더라고.”
양철식 씨가 들고 있는 공은 바로 막내아들 양준혁의 통산 341호 홈런 기념구다. 프로야구 역대 최다 홈런을 기록하던 그 순간을 아버지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양 씨는 “이제는 아무 데서도 구할 수도 만들 수도 없는 공”이라면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2009년 5월 9일 341호 홈런치던 날 모습. 대구 | 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어릴 때부터 밤새 방망이 돌리던 연습벌레

양준혁은 위로 누나와 형이 있다. 3남매 중 막내다. 그러나 가난한 집 아이들이 일찍 철이 들 듯, 막내아들 양준혁도 지금까지 싸움 한번 하지 않고, 말썽 한번 부린 적이 없다고 한다.

“준혁이는 그 어린 나이에도 ‘난 이거 아니면 죽는다’면서 정말 열심히 야구에 매달렸어요. 셋방살이를 할 때 헌 그물 하나 구입해서 작은 망을 쳐줬지요. 학교에서 돌아온 다음에도 밤늦도록 방망이를 돌립디다. 내가 공을 올려주고. 토스배팅 같은 거였지요. 그런데 잘못 쳐서 담장을 넘어가 남의 집 장독을 수없이 깼어요.”

양준혁은 키 188cm, 몸무게 95kg의 거구다. 그래서 아버지를 보면 작은 체격부터 눈에 들어온다.

“내 키는 168cm나 될라나. 그래도 할아버지는 체격이 컸어요. 외가 사람들은 다 통뼈야. 그걸 닮았나봐. 태어날 때부터 크더라고. 우량아였지. 국민학교 입학할 때 맨 뒤에 줄 섰고. 그때는 호리호리했어.”

○역대 최다안타, 역대 최다홈런, 그리고 선수협

아버지는 야구를 시작한 뒤 늘 상장을 타 오던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프로야구 최고타자로 성장해준 아들이 고맙다. 아버지로서 언제 가장 기뻤을까.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날고 기던 선수들이 프로에 와서 1, 2년 만에 소리없이 사라지는 선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준혁이도 프로에 우여곡절 끝에 들어왔는데 신인왕 받았을 때 가장 기뻤어요. 프로에서도 인정을 받고 살아남을 수 있겠구나, 됐구나 싶었으니까. 그리고 통산최다안타 신기록, 통산최다홈런 신기록 세울 때도 잊을 수가 없지요. 우리 아가 타자로서는 몇 개 기록을 가지고 있지. 하하.”

그는 ‘몇 개’라고 표현했지만 양준혁은 사실상 프로야구 타자 부문 거의 모든 기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 가장 안타까웠을까.

“벼락같이 해태로 트레이드될 때, 선수협 결성할 때 선수생명이 끝나는 줄 알고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김응룡 사장님이 불러서 이렇게 다시 삼성에서 선수생활을 하게 됐지만. 그때 결혼 적령기였어요. 띠도 물어보고 그러는 걸 보고 결혼하려고 그러는가보다 생각했는데 그때 그런 일들이 터지니까 결혼시기를 놓쳐버린 것 같아요. 어쨌거나 성대하게 은퇴식을 해주시는 삼성구단에 너무 고맙습니다.”

아버지는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아들을 보면 가슴이 아린 모양이다.

“예전에는 장가가란 소리 계속 했지만 이젠 그런 얘기도 안합니다. 자기도 결혼 얘기만 나오면 노이로제가 걸리는 모양입디다. 알아서 하겠지요. 그래도 좀 그렇긴 해요. 남들은 은퇴식할 때 아내하고 아들 손잡고 하던데, 우리 아들은 혼자 나가서 해야 하잖소. 준혁이 에미가 얼마 전에 허리 수술을 했어요. 준혁이 잘 되라고 절에 가서 기도하고 그러더니 준혁이 프로 들어갈 때부터 류머티스 관절염에 걸려 고생 했지요. 그게 허리까지 간 건지, 이젠 좀 먹고 살만 하니까 이런 일이….”
마흔 살이 넘도록 결혼을 안한 상태에서 은퇴를 선언한 양준혁. 팬들의 안타까움도 더 하다. 2008년 두산과의 플레이오프 1차전 때도 양준혁의 노총각 탈출을 바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려 눈길을 끌었다.스포츠동아DB


○지금은 무덤덤하지만 눈물 날 것 같소

양철식 씨는 대구에서는 유명인사다. 야구장에 가면 팬들도 그를 알아보고 인사한다. 푸른 피의 전설을 길러주신 데 대한 경의의 표시인지도 모른다.

“난 운전면허가 없어 야구장 올 때도 항상 버스나 택시를 타지요. 택시 기사들이 ‘양준혁 아버님 아니시냐’면서 차비도 안 받을라 그래요. 그런데 차비 안 내면 더 우습지요. 아들이 홈런 치면 난 속으로만 박수를 쳐 왔어요. 양준혁 아버지라는 걸 다들 아니까 말도 함부로 못합니다. 항상 조심스럽지요. 난 술도 잘 못하지만 술자리에서 말실수해서 아들 욕 보일까봐 조심해요. 요즘 보는 사람마다 그럽디다. 우리도 양준혁이 은퇴하니 마음이 이런데 어르신 섭섭하겠다고. 지금은 무덤덤한데 막상 은퇴식 때는 모르겠소. 눈물이 날 것도 같고.”

양준혁은 이날 광주 원정길에 앞서 대구구장에서 인터뷰하는 아버지를 업었다. 막내아들의 넓디넓은 등에 업힌 아버지는 “아들한테 업혀보는 건 처음이야”라며 껄껄 웃었다.

대구 |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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