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이룬 여왕은 휴식을 원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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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아, 토리노 세계피겨선수권 아사다에 밀려 2위

‘피겨 여왕’ 김연아(20·고려대)의 표정은 예상과는 달랐다. 27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쇼트프로그램에서 7위에 그친 뒤 열린 프리스케이팅 출전 순서 추첨행사에서 만난 그는 밝은 표정이었다. 본인이 밝혔듯 어이없는 실수를 연달아 한 뒤 7위라는 성적을 받아든 올림픽 챔피언의 표정이 아니었다. ‘기분이 좋은 것 같다’는 말을 건네자 “내일이면 경기가 끝나잖아요”라며 웃었다.

28일 프리스케이팅을 마친 뒤 만난 김연아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는 프리스케이팅에서 기술점수 66.45점, 프로그램 구성점수 65.04점, 감점 1점을 받아 130.49점을 기록했다. 두 번의 점프 실수가 있었지만 다른 선수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한 성적이었다.

김연아의 표정은 이런 성적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 아니었다. 바로 대회가 끝났기 때문에 지은 표정이었다.

김연아는 “시즌이 끝나기만 기다려왔다. 올림픽이 끝났을 때보다 더 기쁘다”고 말했다.

김연아는 이번 대회에서 190.79점을 받아 2위에 머물렀다. 쇼트프로그램에서 올 시즌 최악의 연기(60.30점)를 선보이며 부진했지만 프리스케이팅에서 1위로 선전해 은메달을 차지했다. 금메달은 일본의 아사다 마오(20)가 프리스케이팅에서 129.50점을 받아 쇼트프로그램 점수 68.08점을 합쳐 197.58점으로 차지했다. 지난달 열린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 은메달에 그친 것을 설욕한 셈.

올림픽 우승후 허탈감에 방황
포기하려다 1주일 훈련후 출전

동기부여도 안돼 예상된 결과
“올림픽 끝났을때보다 더 기뻐”

아사다 “연아와 경쟁하며 성장”


이번 결과는 사실 경기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됐다. 김연아는 올림픽 이후 허탈감 탓에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세계선수권 출전을 포기할까도 고민했다. 이렇다 보니 훈련도 일주일만 하고 토리노에 도착했다. 훈련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컨디션도 올림픽을 위해 맞춰놓았기 때문에 최상은 아니었다.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최고의 목표를 이룬 뒤 다른 목표를 찾지 못했다. 세계선수권 2연패는 올림픽 금메달에 비해 제대로 된 동기 부여를 해주기 힘들었다. 스스로도 “정신적으로 풀어져 있었다”고 표현한 대로 김연아는 이번 대회에서 긴장감을 느끼지 못했다. 어머니 박미희 씨도 “경기를 앞두고 왜 이렇게 긴장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김연아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그냥 빨리 끝나기만 바랐다. 결국 2위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뒀지만 김연아에게 중요한 것은 우승보다 대회를 빨리 마무리 짓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한편 아사다 마오는 “나는 아직도 기술적으로 발전해야 할 부분이 많다. 김연아와 경쟁하면서 나도 성장할 수 있었다. 김연아에게 감사한다”고 우승 소감을 밝혔다.

▼은퇴? 현역? 연아는 “…”

올림픽 金 19명중 15명 시즌후 은퇴… 은퇴해도 언제든 복귀 가능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전 국내외 취재진은 김연아의 2연패 달성 여부보다 은퇴 여부가 더 큰 화제였다. 토리노에 온 외국 기자들은 한국 기자들을 볼 때마다 ‘은퇴 질문’을 꺼냈다.

현재 김연아가 고민하고 있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은퇴해 아이스쇼에 전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에 도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역대 여자 싱글 금메달리스트 19명 중 15명은 올림픽 시즌이 끝난 뒤 은퇴했다. 금메달을 딴 뒤 다음 올림픽에 출전했던 선수는 소냐 헤니(노르웨이)와 카타리나 비트(독일) 두 명뿐이다.

목표와 동기 상실이 가장 큰 이유다. 김연아도 “올림픽 이후 정신적으로 풀어졌다”며 목표를 이룬 뒤의 허탈감을 나타냈다. 은퇴를 하더라도 김연아는 언제든지 다시 현역으로 복귀할 수 있다. 아이스쇼를 뛰면서 개인 훈련을 충실하게 해 기량만 유지한다면 그랑프리 시리즈에 복귀할 수 있다.

실제로 복귀했다가 성공한 사례도 있다. 예브게니 플류셴코(러시아)와 스테판 랑비엘(스위스)은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에서 각각 금메달과 은메달을 딴 뒤 프로로 전향했다가 밴쿠버 올림픽을 앞두고 복귀해 2위와 4위에 올랐다. 하지만 남자 선수와 여자 선수는 다르다. 토리노 대회 은메달리스트 사샤 코언(미국)은 밴쿠버 대회를 앞두고 복귀를 했지만 결국 국내 선발전에서 탈락하며 올림픽 무대도 밟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여자 선수들은 몸의 변화와 체력 저하가 심하기 때문에 복귀해 성공한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한다.

이런 점들을 들어 주위의 많은 사람은 김연아가 소치 올림픽까지 선수생활을 계속하길 바라고 있다. 김연아의 매니지먼트사인 IB스포츠의 한 관계자는 “어머니와 아버지도 연아가 선수생활을 더 하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김연아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연아는 은퇴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김연아는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을 뿐이다. 이번 대회에서 2위를 차지한 것도 어떻게 보면 지기 싫어하는 김연아에게 새로운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

김연아는 31일 귀국해 아이스쇼(4월 16∼18일)를 준비하면서 1개월간 한국에 머물 계획이다. 소치 올림픽까지는 4년의 시간이 남은 만큼 일단 충분한 휴식의 시간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토리노=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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