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일의 ‘내사랑 스포츠’] 프로농구무대 누비는 ‘아줌마’ 선수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6일 11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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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를 끝내고 코트를 빠져나오는 여자농구 선수들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는가. 격렬한 전투를 치른 그들의 어깨를 비롯해 팔 등에는 시뻘겋게 긁힌 자국투성이다. 시즌 중 수 천 번의 점프를 감당해야 하는 무릎에는 두꺼운 보호대를 착용하지 않은 선수를 보기가 힘들 정도다.

빙판 위를 한 마리 백조처럼 달리며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피겨스케이팅에서는 20세기 동갑나기인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 등 푸릇푸릇한 젊은 세대들이 활개를 친다.

이와는 달리 달리고 뛰는 것은 기본이고 격렬한 몸싸움을 벌여야 하는 농구야말로 여자들이 하기에는 거친 운동. 그래서일까.

2000년 출범 이후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여자프로농구에서 강인하고 억센 아줌마 선수들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1967년 체코세계농구대회 준우승,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은메달 등 한국 스포츠사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뒀던 여자농구.

한국농구의 대모(代母)로 불리는 고(故) 윤덕주 여사부터 억척스러운 아줌마 선수였다.

1947년 6월 1일. 숙명구락부 대 경전구락부의 전국종합농구선수권대회 여자부 결승전이 열린 서울운동장 정구코트.

당시 굴지의 기업이었던 경성전기가 국내 최초의 여자농구실업팀으로 출범시킨 경전구락부는 숙명여고 출신이 주축을 이룬 숙명구락부보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한 수 위였다.

게다가 숙명구락부의 주전 센터로 팀의 주축인 윤덕주는 딸을 2명이나 가진 가정주부. 전반전을 9-13으로 뒤진 숙명구락부의 윤덕주는 하프타임 때 관중석을 올려다 보다 깜짝 놀랐다.

남편(서정귀 전 호남정유 회장)과 그 옆에 아기를 안고 있던 중년 부인이 급한 손짓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 윤덕주는 곧 관중석으로 달려갔다. 중년 부인은 그의 사촌 동서로 두 살 된 그의 둘째 딸을 안고 있었던 것. 아기가 배가 고픈지 심하게 우는 바람에 급히 윤덕주를 부는 것이었다.

남편과 동서가 양쪽으로 대충 눈길막이로 서 있는 동안 윤덕주는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아기가 잠들자 윤덕주는 바로 코트로 복귀했다.

후반 경기가 시작되자 엄마에서 코트의 전사로 다시 돌아온 윤덕주는 펄펄 날았다. 그의 맹활약에 힘입어 숙명구락부는 29-23으로 승리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 최우수선수(MVP)는 당연히 윤덕주에게 돌아갔다.

2005년 작고한 윤 여사는 슬하에 1남 7녀를 두었는데 넷째 딸을 임신했을 때도 선수로 코트를 누빌 정도로 대단한 여걸이었다.

1934년부터 1950년까지 16년 간 선수로 뛰었던 윤 여사는 은퇴 이후에도 대한농구협회 이사 및 부회장을 역임하며 한국농구 발전을 위해 기여했다. 또한 국제농구연맹 중앙집행위원, 아시아농구연맹 집행위원, 아시아농구연맹 여성분과위원장 등 국제적으로도 주요 직책을 수행했다.

오늘날 윤 여사의 이런 DNA를 이어 받은 아줌마 선수들이 프로무대에서 맹활약하며 여자농구의 흥행을 이끌고 있다.

신한은행 삼성생명 금호생명 국민은행 신세계 우리은행 등 6개 여자농구 프로팀에 소속된 선수는 총 97명.

이중 결혼한 선수는 6명. 총 선수의 6.2% 밖에 되지 않지만 이들은 각 팀 전력의 중심축으로 득점과 어시스트 등 각종 개인 기록 부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맹위를 떨치고 있다.

딸 한명을 둔 전주원(38·신한은행)은 6일 현재 어시스트 부문에서 2위(7.27개·이하 한 경기 평균 기록)에 올라있고 가로채기 6위(1.18개), 득점 23위(8.41개)를 마크하며 '컴퓨터 가드'라는 명성을 떨치고 있다.

187㎝의 장신 센터 이종애(35·삼성생명). 아직 자녀는 없지만 주부선수인 그는 블록 슛 1위(3.09개), 리바운드 4위(7.86개), 득점 10위(12.68점)에 올라 있다.

득점 5위(16.05개), 리바운드 8위(6.23개), 어시스트 7위(4.68개), 가로채기 8위(1.14개) 등 전 부문에서 고르게 활약하고 있는 '파워 포워드' 박정은(33·삼성생명). 그의 남편은 배우 한상진 씨. 시즌 중에는 서로 얼굴 볼 시간조차 없지만 박정은은 이를 악물고 코트에 온몸을 던진다.

'코트의 탱크'로 불리는 김지윤(34·신세계)은 어시스트 3위(6.32개), 득점 6위(15.86점), 가로채기 11위(1개)를 기록하고 있고 '총알 낭자' 김영옥(36·국민은행)은 가로채기 3위(1.62개), 득점 11위(12.57점), 어시스트 11위(3.05점)에 올라 있다.

딸 2명을 두고 있는 허윤정(31·삼성생명)은 최근 부진에서 탈출하기 위해 훈련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플레이오프전에 나갈 4강에 들기 위해 치열한 순위 다툼이 펼쳐지고 있는 여자프로농구. 이들 아줌마 스타들 덕분에 더욱 볼 맛이 난다.

권순일 기자 stt7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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