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응원 뒤끝 명암]광화문 깨끗-강남대로 법석

  • 입력 2002년 6월 5일 18시 52분


전 국민이 월드컵 첫승의 감격을 함께 나눈 4일 밤 시민들은 거리에서, 술집에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5일 새벽까지 “대한민국”을 외치고 또 외쳤다.

그러나 거대한 감격의 뒤끝은 우리 응원문화의 명(明)과 암(暗)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일부 시민은 경기가 끝난 뒤 주위의 쓰레기를 깨끗이 주운 반면 또 다른 수천명의 시민은 밤늦게까지 도로를 점거하고 소란을 피워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지킬 건 지킨다〓4일 오후 10시반경. 한국의 승리가 결정되자 서울 종로구 세종로 네거리를 가득 메운 10만여명의 시민은 “대∼한민국”과 “오 필승 코리아”를 합창하며 하나 둘씩 자리를 떴다.

이 틈에서 허리를 숙여 주위의 신문지와 페트병 등 각종 쓰레기를 줍는 수백명의 학생과 시민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보도블록 틈 사이에 끼어 있던 신문지 조각까지 놓치지 않고 손가락을 넣어 빼냈다.

쓰레기를 줍던 회사원 김남정씨(30·여)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내가 남긴 쓰레기를 내가 치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교보빌딩에서 TV로 경기를 보던 회사원들이 승리를 자축하며 수백장의 A3용지를 하늘로 뿌렸을 때도 시민들은 “주워라, 주워라”를 외쳤다.

A3용지를 십여장 손에 쥔 전아리양(16·중3)은 “버리기 아깝잖아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이날 세종로 곳곳엔 이런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아놓은 쓰레기더미가 수십여 군데 생겼다. 이 덕분에 경기가 끝나고 3시간여 만에 그 넓은 세종로는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상호(李相浩) 종로구청 청소과 작업팀장은 “수십명의 학생이 쓰레기 수거 작업을 도와줬다”며 “다만 미리 쓰레기봉투를 시민들에게 나눠줬다면 더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훌리건, 남의 일이 아니다〓5일 오전 1시반경.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 씨티극장 앞 도로는 ‘무법천지’였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1000여명의 시민이 양재동 방향 편도 4차로를 모두 점거한 채 노래를 부르며 “대∼한민국”을 외쳐댔다. 폭죽을 쏘아올리고 자동차 경적을 울려대는가 하면 물병 등을 도로 너머로 던지기도 했다. 술에 취한 채 중앙분리대 위에 앉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손님 한 명을 태운 한 택시는 이들에 둘러싸여 10여분간 오도가도 못했다. 시민들은 택시 몸체와 유리창을 손으로 두드리며 웃고 떠들었다. 겨우 풀려난 택시 운전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현장을 빠져나갔다.

현장에 있던 10여명의 경찰과 의경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한 의경은 “경기가 끝난 4일 오후 11시반경부터 3000여명의 시민이 도로를 점거하기 시작했다”며 “이들은 도로 점거와 해산을 반복했고 관할 경찰서 당직실장이 탄 순찰차까지도 이들의 조롱 섞인 두드림을 당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5일 오전 2시경에야 출동한 전경 1개 중대에 의해 겨우 해산했다. 이 여파로 일대 교통은 극심한 정체를 보였다.

이날 우크라이나 모 방송사 직원 2명은 한국 응원단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다.

김영희(金榮熙) 경찰청 훌리건전담반 반장은 “우리가 경기에 질 경우 일부 응원단이 술을마시고 난동을 부리는 등 훌리건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