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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5월 6일 20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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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에서 대지주 손자로 태어난 그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서울로 유학와 중동학교를 마쳤다. 당시 학교를 함께 다니던 친구들이 해방 후 정국을 쥐고 흔들었지만 참 자유인의 꿈을 안고 낙향했다. 요즘 유행(?)하는 귀농의 원조인 셈. 농사를 짓고 나무를 키우며 대자연의 이치를 터득하고 인생을 배운다는 고집쟁이 농사꾼인 그로부터 강팍한 이 시대 ‘잘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들어본다.
그는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현암사)라는 두 권의 책을 내기도 했다.
중앙선 기차를 타고 네시간여 달려 안동역에서 내려 다시 봉화행 고속버스를 타고 원천까지 한시간. 그곳서 30여분쯤 걸어들어 가면 전 할아버지가 사는 구천마을에 닿는다.
〈봉화〓허문명기자〉
이 놈 율무는 아주 대단해. 비오고 바람불면 한꺼번에 쓰러졌다가 비가 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일어선다고. 대단한 생명력이지.
파는 또 어떻구. 뿌리를 싹 자르고 심어야 크게 자라니 얼마나 신기해. 사람도 마찬가지야. 바꾸려면 뿌리를 바꿔야지, 제도나 이데올로기가 아니여.
몇년 전부터 농사는 내 먹을 만큼만 하고 나무를 주로 키워. 없는걸 만들어내는 건 농업밖에 없어. 상업이야 있는 물건 사고파는 거고 공업도 모양만 바꾸는 거 아냐. 식물만 새로운 걸 만들어내지.
내가 나무와 풀을 좋아하는 건 그것들로부터 세상살이 이치를 배우기 때문이지. 한 자도 안되는 도라지는 겨울 땅 속에서 완전히 얼었다가 봄이 되면 어김없이 다시 살아나. 시련을 달게 이기고 일어서는 게 사람보다 나아.
나무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가지 뻗으며 사는데 빛 많이 받는 남쪽가지가 북쪽보다 길고 크지. 그렇다고 북쪽 가지가 남쪽으로 가진 않아. 사람은 어떤가. 편하게 살겠다고 농촌을 버리고 다들 도시로 갔잖아. 그래서 남은 게 뭐야. 눈에 쌍심지 돋우고 분초 다투며 산 끝에 다들 나가 떨어지잖아. 도시에서는 요즘 매일 30명이 자살을 한다며. 남 탓할 것 없어. 서울가면 큰 수나 날 줄 알고 남부여대하고 몰려간 거 아냐. 어떤 사람이 취직해 열심히 일했더니 과장 부장 사장된 다음 송장이 되더라는 농담도 있더구만.
내가 좋아하는 도연명 말처럼 ‘헛살아야 해’. 이루지 못하고 흔적을 남기지 못한다 해서 아쉬워할 거 없어. 괜히 뭔가 이루려고 아등바등하지 말고 그저 살아있으니 산다는 생각으로 단순하게 살면 돼.
마누라는 오륙년 전에 죽었고 애들(3남3녀)은 모두 나가 살아. 고등학교 나온 놈도 있고 초등학교만 마친 놈도 있어. 막내딸은 공부 지지리 못했는데 시집가서 잘만 살아.
처음 혼자 됐을때는 미치겠더니 차차 익숙해지더구만. 혼자사니 생활이 단순해져 좋아. 결국은 혼자 살고 죽는거야. 잘 산다는 건 옳게 사는거지 사람 많은데 따라가며 사는 게 아니야.
한 삼십년 쉼없이 움직거리며 일하다보니 일에는 워크(Work)와 레이버(Labour)가 있는 거 같아. 워크는 그야말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고 레이버는 팔기 위해 노동을 하는 거지. 요즘 직장잃은 사람들 많은데 그렇다고 일(Work)이 없어진 게 아니야. 할 일은 얼마든지 있어.
벼룩은 보통 한번에 3m를 뛴데. 2m 유리병에 벼룩을 가둬놓았더니 유리병을 치워도 1.8m만 뛰고 말더라구만. 사람도 똑같애. 직장은 어쩌면 유리병같은 거라구.
인생은 사는 길이 참 많아. 남들이 옳다고 하는 관습, 상투 이런 것에서 벗어나야 해.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이 말이야. 아이고, 오늘도 쓸데없이 말만 늘어놓았구만. 서둘러 밭일 나가야겠어.
전우익<농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