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회사는 뺑소니범입니다. 교통사고(흡연)로 인해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는데 운전자(담배회사)는 도망간 것입니다.”
15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내외 담배회사 3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2심에서 또 패하자 정기석 건보공단 이사장은 “법원 판단을 존중하지만 과학과 법의 괴리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이번 소송은 2014년 시작됐다. 건보공단은 2001~2010년 폐암 또는 후두암 진단을 받은 건강보험 가입자 3465명에게 지급한 진료비 533억 원을 배상하라며 KT&G, 한국필립모리스, BAT로스만스(옛 BAT코리아) 등 담배회사 3곳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2020년 1심에 이어 이번 항소심에서도 법원은 결국 담배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의료계에선 “흡연과 암 발병의 인과관계조차 법원이 인정하지 않은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 흡연-폐암 인과관계 인정 못 받아
지난 15일 서울역 인근 흡연구역. 2026.1.15 뉴스1재판부는 2심에서도 흡연과 암 발병의 개별적 인과관계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았다. 선고문에서 “피고들의 불법 행위가 증명되지 않아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할 수 없는 이상, 이 사건 대상자들의 흡연과 폐암 발생 사이의 개별적 인과관계에 관해서는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다. 폐암이 흡연 이외에 음주, 식생활 습관, 직업적·환경적 요인, 가족력 등 다른 요인에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의료계는 암과 흡연 사이의 인과관계가 의학적으로 명백하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건보공단 건강보험연구원과 연세대 보건대학원 연구에서 장기 흡연의 소세포 폐암 발생 기여도는 98.2%로 나타났다. 이 연구는 흡연 기간이 30년 이상이면서 하루 한갑씩 20년 넘게 담배를 피운 흡연자를 대상으로 했다. 편평세포후두암과 편평세포폐암 발생 기여도도 각각 88.0%, 86.2%나 됐다. 정재훈 고려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의학적으로 흡연은 폐암을 일으키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라며 “이 정도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음식이 인체에 유해하다’는 평가가 무의미하다”고 비판했다.
소송에서는 담배가 인체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위험 물질인지를 제조사가 소비자에게 충분히 알렸는지도 쟁점이었다. 건보공단은 담배회사가 중독성을 높이기 위해 암모니아 등을 첨가하거나 ‘라이트’ 등의 문구를 넣어 담배가 덜 해롭다는 잘못된 인식을 조성하며 위해성을 은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담배의 위험성은 이미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져 제조사가 고의로 위험을 은폐했거나 허위 정보를 제공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건보공단이 흡연자를 대신해 담배회사에 직접 손해배상을 청구할 법적 권리가 있는지도 쟁점이다. 법원은 건보공단이 지급한 보험 급여는 건보공단의 고유 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담배회사의 행위가 건보공단의 법적 이익을 침해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건보공단은 “이미 개별 환자들이 소송해서 패한 뒤, 피해 사실을 직접 입증하기 어려운 이들을 대신해 건보공단이 소송을 제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건보공단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흡연으로 인한 국민 진료비 지출은 3조8589억 원에 이른다. 2014년부터 2024년까지 11년간 흡연으로 발생한 총진료비가 40조7000억 원이 넘는다는 추정치도 있다. 건보공단은 이같은 천문학적 재정 부담에 담배회사가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 미국, 캐나다에선 수십조 원 배상 판결
담배 소송 역사가 긴 해외에서는 이미 담배회사가 피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이 여러 차례 나왔다. 캐나다에서는 1998년 폐암과 인후암 등에 걸린 흡연자 약 110만 명이 담배회사 3곳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제기했다. 2015년 법원이 담배회사의 책임을 인정하며 150억 캐나다달러(약 15조9500억 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하자, 담배회사들은 파산 보호 신청을 하며 협상을 시작했다. 결국 지난해 325억 캐나다달러(약 34조5600억원) 규모의 배상 계획이 포함된 최종 중재안이 확정됐다.
미국에서는 1998년 ‘담배 마스터 합의서(MSA)’가 나왔다. 미국의 46개 주 정부와 4대 주요 담배회사 간에 체결된 것으로, 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사 화해 계약이다. 담배회사들은 주 정부들에 2060억 달러(약 270조 원) 이상을 지급하기로 합의했으며, 현재까지도 매년 배상금을 주고 있다. 미국 연방정부도 1999년 7대 담배회사와 2개 담배연구소를 부정부패 조직범죄 방지법 위반으로 제소해 담배회사의 위법 행위가 인정되기도 했다.
미국과 캐나다 등에서는 담배회사가 담배 유해성을 알고도 이를 은폐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소송 판도가 뒤집어졌다. 미국에선 담배회사가 담배의 중독성을 인지했고, 중독성을 높이기 위해 니코틴 함유량을 늘린 사실이 내부 고발과 기밀문서 유출을 통해 밝혀지면서 배상 판결을 이끈 결정적 요인이 됐다. 전문가들은 건보공단도 대법원 상고심에서 담배회사들의 기만 행위를 입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명승권 한국금연운동협의회장(국립암센터 교수)은 “캐나다는 담배 손해 및 치료비 배상법이 있어 정부가 담배회사에 흡연 관련 진료비를 직접 회수할 수 있지만, 한국은 그런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이 한계”라면서도 “담배의 중독성을 흡연자에게 충분히 알리지 않았다는 점은 담배회사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