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분당에 사는 김모 씨(38)는 추석을 앞두고 요 며칠 밤잠을 설쳤다. 뉴스에선 “차례를 지내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분위기”라고 떠들지만, 김 씨에게는 그저 딴 세상 이야기다. 그는 명절이면 시할머니부터 시조카까지 15명 안팎의 4대가 경북 경주 본가로 모이는 대가족의 맏며느리다. 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차례음식이 집까지 배달되는 시대인데도 ‘정성’을 강조하는 어르신들 앞에선 ‘그림의 떡’일 뿐이다. 김 씨는 “긴 연휴에 여행을 간다는 팀원들이 부럽다”고 했다.
민족 대명절, 추석이 마냥 즐겁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세대 교체 등으로 명절에 온가족이 떠들썩하게 모이는 분위기가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대가족이 본가에 모여 차례를 지내는 집은 남아 있다. 최근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4.8%는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고 했다. 이를 뒤집어 보면 100명 중 35명은 여전히 차례를 지낸다는 것. 이같은 분위기는 온라인에서도 느낄 수 있다. 실제 추석을 일주일 여 앞둔 9월 말 기혼 여성들이 많이 모인 지역 커뮤니티 등에는 “이번엔 꼭 여행가고 싶었는데 올해도 실패. 차례상 안 차리면 전쟁이라도 나는 건가” “당연히 해야 한다? 이것도 가스라이팅 아니냐” 등의 격한 반응이 이어졌다.
● 여성도 남성도…“차례 지내기 싫다고요”
참고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명절즈음만 되면 전국 며느라기의 대나무숲인 지역 커뮤니티가 들썩인다. 대부분은 “올해도 차례상 차리러 간다” “하루종일 음식 만들고 뒷정리 하는 것도 이제 그만 하고 싶다” 등 푸념이다. 명절 가사 노동에 대한 불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차별 없이 자라온 세대인 20~30대 젊은층의 반감은 한층 거세다. 서울 강동구에 사는 최모 씨(31)는 “우리집에서도 차례상을 차려본 적이 없는데 결혼 후 시가에서 이른 아침부터 차례상을 차릴 생각만 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토로했다. 이어 “남들은 연휴에 놀러가거나 직계가족끼리 한 끼 외식하고 헤어진다는 데 나는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싶다”며 “명절을 아예 없애버렸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요즘은 남성들도 명절 스트레스에서 자유롭지 않다. 명절 연휴에 수 시간을 운전해 본가에 내려가고도 음식을 만드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느랴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는 불만이다. 특히 차례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는 맏아들의 반발은 늘어만 가고 있다. 장손인 정모 씨(41)는 “아버지가 내년부턴 우리집에서 차례를 지내라는 데 장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이걸 왜 떠안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아내와 함께 책임지고 준비해야 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1년에 2번씩 우리집에 모이는 친척들의 식사를 차리는 것도 결코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몇 해 전 인터넷상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장손 사표를 냈다”는 글이 올라와 맏아들들의 공감을 샀다.
명절마다 주머니 사정은 넉넉치 못한 데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차린 뒤 바리바리 싸주는 차례 음식은 곱게 보일리 없다. 한국물가협회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올해 추석 차례상 비용은 28만4010원이다. 경기 화성에 사는 박모 씨(40)는 “(본가인) 전주까지 왕복 주유비에 부모님 용돈, 차례상 비용, 조카들 용돈 등으로 명절마다 100만 원가량 쓰고 오는 것 같다”며 “제일 아까운 게 차례상 비용”이라고 꼽았다. 그는 “차례 지내고 남은 음식은 잔뜩 싸주시는 데 집에서 밥을 자주 해먹지 않으니까 냉동고에 수개월간 쌓아두다 버리게 되면 너무 아깝다”며 “과일 1~2가지에 술 정도만 올려도 될텐데 어르신들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 전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조상 생각하는 마음”
참고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차례(茶禮)는 본래 설과 추석 등 명절이나 절기가 돌아온 것을 조상에게 알리기 위해 예(禮)를 올리는 간단한 의식으로, 차(茶)를 올리는 습속에서 유래된 용어다. 예법 지침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차례상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과일 한 쟁반과 술 한 잔, 차 한 잔을 올리고 축문도 읽지 않는 것으로 돼 있다. 일반 가정에서 부침개와 전, 문어, 조기, 잡채 등 갖가지 음식을 차례상에 올리는 것은 사실상 제사상에 가깝다는 게 전문가의 지적이다. 김미영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은 “(친척 등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나눠먹는 우리나라 정서에 경제적 여유가 더해지며 차례상은 사라지고 제사상만 남게 된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령으로 제정된 건전가정의례준칙에 따른 관련 법령 예시에는 ‘차례는 매년 명절의 아침에 맏손자의 가정에서 지낸다’고 쓰였다. 강제력이나 처벌 조항은 없으나 ‘시대착오적’이란 지적이 수년째 이어지고 있다. 제례는 맏아들 집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은 유교에서 비롯됐다. 차례상의 본래 모습을 되살리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가족 갈등도 줄어들지 않을까. 김 위원은 “전통 문화를 너무 원형만 고집하다 보면 단절이 온다”며 “형식을 두고 가족끼리 싸우면 뭐 하느냐. 지금이야말로 탄력적 계승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이어 “예법에서 다소 벗어나더라도 조상에 대한 마음만 있으면 어디에서 차례를 지내던 상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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