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노년이 마음을 열었다…신구대 식물원의 정원치유[김선미의 시크릿가든]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26일 07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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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 동백, 해바라기, 앵초, 느티나무…. 어르신들의 가드닝 앞치마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식물 이름이 크게, 본래의 이름 석 자는 괄호 안에 작게 쓰여 있었다.

가을빛이 깊어가는 정원에 26명의 어르신이 모였다. 우울증을 진단받거나 정서적 지원이 필요한 분들이었다. 하지만 표정이 맑고 환했다. “우리 행복팀이 가꾼 정원이랍니다. 해바라기 백합 목련을 심었어요.” 물 조리개를 들고 꽃에 물을 주거나, 잡초를 뽑는 자세가 진지하면서도 행복해 보였다.
지난달 31일 경기 성남시 신구대식물원 오감치유정원에서 우울감을 겪는 어르신들이 사회적 약자 가드닝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신구대 식물원 제공
한 어르신이 말린 꽃으로 액자를 만들어 환하게 웃고 있다. 신구대 식물원 제공


●사회적 약자 가드닝 ‘할매 할배의 초록손’
이곳은 경기 성남시 수정구에 있는 신구대 식물원이다. 신구대 식물원은 ‘할매 할배의 초록손’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약자 가드닝 프로그램을 3년째 펼치고 있다.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우울한 어르신들을 정원 활동에 참여시켜 사회적 관계 형성을 돕는다.

참여자들이 정원을 돌보는 모습. 성남=김선미 기자

이 프로그램에 참여해보니 어르신들은 처음엔 강사의 안내에 따라 ‘시루떡 감자떡 찹살떡’, ‘감자탕 설렁탕 매운탕’ 등의 구호를 박수치며 따라했다. 인지 기능을 높이기 위한 준비운동이었다. 체조로 몸도 풀고 따뜻한 가을 햇살 아래 도란도란 간식시간도 가졌다.

체조로 몸을 풀고 있는 참여자들. 신구대 식물원 제공

식물원 내 오감치유정원에서 열린 이날의 주요 프로그램은 ‘꽃 누르미 액자 만들기’. 진행을 맡은 강사는 말했다. “오늘은 눌러 말린 꽃들로 액자를 만들어 보려고 해요. 아크릴 필름에 사진을 함께 오려 붙여 보세요. 보기 좋은 곳에 올려두고 그동안의 식물원 활동을 항상 행복하게 떠올리시면 좋겠어요.”

어르신들이 말린 꽃으로 만든 압화 액자. 성남=김선미 기자

어르신들은 19주 동안 채소정원 만들기, 그라스 가든 산책, 허브 향기 테라피, 꽃무릇 정원에서 인생 사진 남기기, 정원 요정(허수아비) 만들기 등의 활동을 했다. 어르신들이 만든 정원 요정에 왠지 마음이 끌렸다. 형형색색 솜 구슬을 단 스웨터를 입고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젊은 날 모습일까.

어르신들이 만든 정원 요정(허수아비). 성남=김선미 기자

참여자들 대부분이 홀로 사는 분이어서 마음이 짠했다. 식물원에 따르면 사회복지사가 옆에 없으면 불안해하던 어르신들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많이 웃게 됐다고 했다. 자신의 얘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이젠 다시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
신구대 식물원은 올해 상·하반기 진행한 이 정원치유 프로그램의 성과를 평가해 최근 산림청에 보고했다. 우울증 진단을 받거나 우울증 자가진단 경고 이상인 65세 이상을 대상으로 실험군(프로그램 참여자)과 대조군(미참여자)으로 나눠 신체적 건강, 정신적 건강, 사회적 건강을 살펴봤다.

그 결과 신체적으로는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실험군의 경우 평균 0.8kg 체중이 감소(대조군은 평균 0.36kg 증가)했다. 다리에 힘이 생기고 손의 소근육도 발달했다.

자신들이 직접 가꾼 정원을 돌보고 있는 참여자들. 성남=김선미 기자

한국정신과학연구소 통합뇌휴먼심리연구소에 의뢰해 진행한 정신적 건강의 척도지 검사에서는 실험군의 우울 점수가 평균 8.02점 감소(대조군은 평균 1.85점 감소)했다. 활력, 삶의 질, 마음 챙김에서도 실험군은 대조군에 비해 월등히 높은 성과를 보였다.

사회적 건강 조사는 심층 인터뷰로 진행했다. “‘살구꽃’ 어르신이 먼저 친절하게 대해주고 아는 척해줘서 고마웠다.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은 아직 힘들지만 앞으로 실천하고 싶다”, “집에서 혼자 아무 말도 안 하는 것보다 여기 와서 이런 말 저런 말 하는 것이 더 좋고 행복해졌다”, “동료들과 같이 활동하는 것이 기다려진다. 이제는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다시 생겼다”….

‘할매 할배의 초록손’ 프로그램 활동 모습. 신구대 식물원 제공

산림청은 올해 신구대 식물원 등 11개 기관에 사회적약자가드닝프로그램을 위탁해 실시했다. 우울증세 어르신, 치매 돌봄 가족, 정신 질환자 등이 대상이었다. 영국의 이든 프로젝트와 왕립원예협회(RHS), 미국 시카고 식물원, 호주 왕립식물원 등 해외에서는 정원치유가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다. 싱가포르는 국가공원위원회 주도로 2030년까지 치유정원 30곳을 조성한다는 목표다.

●‘오후만 남은 휴일’에도 찾을 수 있는 식물원
17만 평 규모로 2003년 문을 연 신구대 식물원은 서울에서 매우 가깝지만 생각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정원’이다. 분당내곡간도시고속화도로가 지나는 그린벨트 사이에 숨어있는 탓이다. 서울시민이 먼 길을 나서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는 거리다.

신구대 식물원 중앙광장. 성남=김선미 기자

매월 다양한 교육 클래스도 열린다. ‘이야기가 있는 가드닝 클래스’를 비롯해 수목전문가 양성과정, 시민정원사 과정 등도 풍부하다. 식물원 곳곳에 두꺼비 동상이 있는 것은 사라져가는 두꺼비를 지키기 위한 염원을 담은 것이다. 멸종위기식물 보존사업과 식물자원 수집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두꺼비를 지키기 위한 식물원의 염원을 담은 동상. 성남=김선미 기자

휴일 오전 내내 자고 일어나 라면 끓여 먹고 나와 거닐 수 있는 곳, 숲의 소리와 흙내음을 느끼며 주중에 쌓인 피로를 떨쳐낼 수 있는 곳, 사계절 다른 색을 선물해주는 곳. 살면서 힘을 다시 낼 수 있는 일상의 치유는 이런 게 아닐까. 연간회원권 하나 끊어두고 언제든 찾아 ‘내 정원’으로 삼고 싶은 곳이다.

‘할매 할배의 초록손’ 프로그램에 참여한 ‘행복팀’ 어르신들이 심은 꽃들. 성남=김선미 기자

무엇보다 ‘할매 할배의 초록손’ 프로그램에 참여한 어르신들의 손을 잡아 드리면서 생각했다. 누구든 부모님 모시고 계절마다 오면 좋을 곳이라고. 그저 손 잡고 정원을 느릿느릿 함께 걷는 것만으로 무척 행복해하실 것 같다고.

신구대 식물원 곳곳에 있는 천사 조형물들. 성남=김선미 기자

문득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를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시인은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했다. 누구든 위로가 필요할 때엔 숲길을 걸어보면 어떨까.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전정일 신구대 식물원장 인터뷰
전정일 신구대 식물원장. 성남=김선미 기자
―신구대 식물원 사회적 약자 가드닝 프로그램의 차별점은.
“전국 300여 개 대학 중 식물원을 가진 곳은 서울대 원광대 신구대 이렇게 세 곳이다. 그중 일반에게 개방하며 식물의 수집 보존 연구 전시 교육 휴양 등 종합 서비스를 하는 곳은 신구대 식물원이 유일하다. 우울한 독거노인들이 드넓은 식물원에 와서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치유를 얻을 수 있다.”

―왜 정원치유가 필요한가.
“2025년이면 국민 5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인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다고 한다. 요즘 60대는 엄청나게 건강하다. 그분들을 사회적으로 가만두면 안 된다. 정원에 나와 일하게 하면 건강보험료 지출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독일에서는 정원치유를 대체의학으로 부르기도 한다. 사회적 비용을 줄이면서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는 활동이 정원치유다. 고령층이 정원의 프로슈머(prosumer·생산자이자 소비자) 역할을 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신구대 식물원의 비전은.
“작은 전문대이지만 공익사업에 힘 쏟고 있다. 식물이 보존됨으로써 지구가 보존된다. 우리의 비전은 식물원 문화의 최고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 식물을 매개로 종합적인 문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교육도 문화의 일부다.”


성남=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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