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낡아버린 내 지식…그래도 평생 근학(勤學)을 권합니다”[서영아의 100세 카페]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3일 07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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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생 2막]
6남 2녀의 장남, 가정 형편따라 교대 진학
42년간 교직 끝내고 중국 고전 번역 매달려
퇴직 13년만에 ‘내 키만큼 내 책을 내겠다’는 목표 완수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 그만둘 수 없어
이름없는 민중의 기록이지만 “이 세상에 쓸모 없는 삶은 없다”

“이름없는 민중의 삶도 더 많이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말하는 진기환 선생. 이훈구 기자 ufo@domga.com
“이름없는 민중의 삶도 더 많이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말하는 진기환 선생. 이훈구 기자 ufo@domga.com
“배우며 살았고 살아보니 늙었지만 죽을 때까지 배움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근학(勤學·부지런히 공부하여 학문에 힘씀)은 교직자였던 진기환 씨(75)가 평생 추구해온 가치다. 1953년 6,25 전쟁 중 국민(초등)학교에 입학한 이래 70년간 공부를 이어왔고, 그 기록을 담은 자서전 ‘도연근학칠십년(陶硯勤學七十年)’을 최근 펴냈다. 도연(陶硯)은 그가 좋아하는 도연명의 이름에서 따온 아호다.
○ “도연 진기환은 열심히 살았다!”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34년간 역사 교사와 교장까지 역임한 뒤 2009년 2월 정년퇴직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14년간 배우고 42년간 가르치며 머물렀던 학교라는 울타리를 이때 처음 떠났다. 하지만 그로서는 별반 달라질 게 없었다. 중국 고전 번역이라는 평생의 과업이 눈앞에 있었다.

재직 중 중국 고전 역서를 15권 출간했고 퇴직할 때 인생목표를 ‘내 키만큼 내 책을(等身書)’ 펴낸다는 것으로 삼았다. 그리고 정년퇴직 후 13년 만에 자신의 키(170cm)를 훌쩍 넘는 37종 81권을 출간해 인생 목표를 달성했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 책은 ‘도연 진기환은 열심히 살았다’는 기록”이라며 “이름없는 민중의 기록에 불과하지만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삶은 없다”고 썼다.

자서전 ‘도연근학칠십년’ 표지
자서전 ‘도연근학칠십년’ 표지

○ 운명과의 타협, 끊임없는 개선 모색
충남 홍성군 넉넉지 않은 농부 집안의 6남2녀 중 장남. 늘 그를 따라다닌 이 현실은 진로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가정 형편 때문에 원하던 약대나 화학전공 대신 2년제 교대에 진학하는 것으로 아버지와 타협했다. 고교 2학년때부터 화학실험실 조수로 일하며 화학에 빠져들었던 그였지만 “동생들도 최소한 중학교까지는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다.

“아버지로서는 농사일에서 2년이나 제외해주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때가 1965년인데, 전교에서 날고 기던 아이들도 집안형편이 어려우면 대학진학은 언감생심, ’5급 을류‘(현재의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는 시절이었어요. 아버지에게 원망은 없었지만 진로를 갑자기 전환하다보니 혼란스러웠습니다. 교대에서 뭘 배우는지도 전혀 몰라 입학 뒤에도 애를 먹었지요. 상실감에 빠져 흘려보낸 시기였지요.”

그는 주어진 운명에 순응했지만 가능하다면 자신의 노력으로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가려고 애썼다.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된 지 1년만에 군에 입대했고 제대 뒤 2년만에 중고교 교사가 되기 위한 준교사 고시검정에 합격해 고등학교 역사교사로 부임했다. 그 몇 년 뒤인 1975년에는 서울 순위고사에 합격해 대동상업고등학교(현 대동세무고등학교)에 부임해 정년퇴직까지 봉직했다.
○ 모수자천
‘모수자천(毛遂自薦)’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우화다. 전국시대 조나라 평원군에게 식객 모수가 사신의 일행으로 끼워달라고 자신을 천거했고, 다른 사람의 비웃음을 샀지만 정작 큰일을 해냈다는 일화다. 진 씨가 자신을 취재해달라며 보내온 메일 제목이 모수자천이었다.

마악 나왔다는 자서전을 받아 뒤적이는 사이 뭔가 숙연한 기분이 든다. 학창시절 성적표에서부터 그가 낸 책들의 머리말까지, 정직하고도 시시콜콜한 기록이 빼곡한 책갈피에서 한인생의 무게가 오롯이 전해져왔다. 행간에 숨어있을 사연들도 헤아려졌다. 예컨대 결혼 이후 1987년 현재의 25평 아파트에 안착하기까지 조금씩 넓혀가며 이사다닌 집의 주소와 평수, 가격이 기록돼 있다. 초중고 생활기록부나 성적표까지 실물이 나온다. 자서전 앞부분에는 대략 10년마다 찍은 증명사진들이 실렸다. 고 3때 입학원서 사진, 군대 제대말년, 결혼식 직후….

“10년 단위로 보면 사람이 이렇게 늙어가는구나 하는 게 보이죠. 저는 역사선생입니다. 역사는 기록이죠. 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으로서 기록을 남기는 것은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기록을 남기는 습관은 이어졌다. 교장으로 재직한 5년간 근무일지를 작성해 3권의 책으로 제본했다. 아들 결혼에 ‘혼사기’를 썼고, 자신의 여행기록을 ’도연유기(陶硯遊記)‘로 남겼다, 손자가 태어난 이후부터 시작한 ‘조손일기’를 16년째 쓰고 있다.

‘혼사기’에는 며느리 후보를 처음 만난 날부터 결혼준비과정의 모든 기록이 담겼는데, 5부를 제본해 아들내외에도 주고 사돈댁에도 보냈다고 한다. 훗날 사람들에게는 이 시대 한국의 보통 가정에서 혼사를 어떻게 치렀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민속사료가 될 거라고 믿는다.

진기환씨가 ’내 키만큼 내 책을 펴낸다‘는 목표를 달성한 것을 기념해 자신의 책 81권을 쌓아놓고 포즈를 취했다. 자택에서 올해 초 아들이 찍어줬다고 한다. 진기환씨 제공
진기환씨가 ’내 키만큼 내 책을 펴낸다‘는 목표를 달성한 것을 기념해 자신의 책 81권을 쌓아놓고 포즈를 취했다. 자택에서 올해 초 아들이 찍어줬다고 한다. 진기환씨 제공

○ 낡은 것의 슬픔
개인적으로 그의 자서전에서 눈에 확 띤 대목이 있다. ‘내 낡은 지식, 이제는 쓰레기’라는 글이었다. 내 책은 이제 한 시대의 슬픈 잔영이다. 내 책은 곧 도서관 수장고 속에 처박히거나 고물상에 폐지로 팔려 파쇄기에 들어갈 것이라고 그는 보고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요.

“세상은 새로운 것들로 넘쳐나고 학문도 그렇습니다. 제 작업은 종이책을 뒤적거리고 사전을 펼치며 만들어냅니다. 주제도 책쓰는 방법도 옛날식이고 주로 옛날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읽지요. 지식에도 수명이란 게 있는 법인데 제 시대는 이제 저문 것이죠. 책을 군말없이 내주는 출판사도 고맙긴 하지만 가끔 보기에 답답하기도 합니다.”

동양고전 전문 출판사인 명문당은 1990년 그의 첫 책 유림외사 3권을 내 준 이래 지금까지 그의 책 70% 이상을 출간해줬다. 그는 자신의 책은 찍을수록 손해일 거라고 보고 있다.

“제 책은 대개 처음에 500부 찍어서 2~3년에 걸쳐 팔아요. 잘 팔리는 책에서 돈 벌어 이런 인기 없는 책 찍어주는 거겠지요. 많지는 않아도 원고료도 줍니다. 제 막걸리값 정도는 되니까요. 하하.”

-쓰레기가 될 거라 생각하면서도 굳이 애써 작업하는 심경은 어떤 걸까요.

“서글프죠. 몇 년 전부터 느꼈어요. 인공지능(AI)에 대한 신문칼럼을 전혀 이해를 못하겠더군요. 이미 나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데도 장애를 느끼는구나. 내 지식은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구나…. 세상은 변하는데 따라가지 못할 것 같은, 밀려나고 있다는 느낌이죠. 애써 일한 것들이 쓰레기가 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거니까. 그냥 열심히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지요.”

자서전에 실린 진기환 씨의 증명사진들. 대개 10년의 간격을 두고 촬영됐다.
자서전에 실린 진기환 씨의 증명사진들. 대개 10년의 간격을 두고 촬영됐다.

○ 내 70년 공부는 뭐였을까…그래도 열심히 했으니 족하다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면서 언제나 긍정의 마인드로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살아온 진기환 전 교장.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면서 언제나 긍정의 마인드로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살아온 진기환 전 교장.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그는 가르치는 데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배우려 했다. 재직 중에 국역연수원(현 고전국역원)과 방송통신대 중국어과, 교원대 대학원에서 도합 10년 간 학업을 병행했다. 어려운 주머니 사정 때문에 학비 없이 공부할 길을 찾아다닌 결과였다. 빠듯한 교사 월급으로 집을 장만하고 아들 둘을 키우고 동생들 학비도 일부 지원해야 했다.

어쩌면 퇴직 후는 인생에서 가장 여유로운 시기였다.

“연금이 나오고 자식들도 장성했으니 돈쓸 일도 사라졌죠. 하지만 저는 62세 퇴직 이후 공부와 번역을 쉰 날이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배움은 그만둘 수 없어요.”

번역서들은 중국의 문사철(文史哲)에 집중됐다. 예컨대 역사서로는 정사 한서(漢書·전 15권), 후한서(전 10권), 정사 삼국지(전 6권), 십팔사략(전 3권) 등이, 문학으로는 당시대관(唐詩大觀· 전 7권), 당시 300수(전 3권) 등이, 철학서로는 공자가어(전 2권), 안씨가훈(전 2권), 논어명언 300선 등이 있다. ‘국내최초 역서’라는 타이틀이 붙은 것이 적지 않다.

-앞으로 계획은.

“지금 ‘수당(隋唐)연의’라는 청나라때 소설을 번역 중인데 500~600쪽 5~6권 분량입니다. 이걸 마지막 작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퇴직한 뒤 10여 년, 남보다 적게 일하지 않았고, 이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별로 아쉬운 게 없어요.”

-100세 시대인데, 앞으로 20여 년은 더 사셔야 할 텐데요.

“공자는 73세, 맹자는 84세에 돌아가셨으니 당시에 대단히 장수한 겁니다. 전 올해 우리나이로 76이니 공자님보다 더 살았어요. 평생 나름대로 근학했으니 언제 염라대왕을 만난다 해도 후회는 없습니다. 맹자처럼 84세까지 산다면 좋겠지만, 글쎄요. 제 건강이 그렇게 될지 모르겠네요.”

○ ’평생근학‘을 권함
그가 ‘모수자천’이라며 취재를 원한 이유는 우리나라 교사들에게 ‘학문을 해야 한다, 적어도 공부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전하고 싶어서라고 했다.

“흐르지 않는 물은 곧 썩고 칼은 갈지 않으면 녹이 슬죠. 교사가 공부하지 않으면 교사의 본분을 다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일군 것들이 헛된 것으로 돌아갈 운명임을 잘 알고 있는 그가, 그럼에도 후배들에게 평생 근학을 권하고 있다. 결국 이게 인생 아닐까.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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