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서울시청 앞에서 홈리스 지원 단체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감염 홈리스의 이송과 치료대책을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2021.12.1/뉴스1
지정된 진료시설만 이용할 수 있었던 노숙인도 동네 병·의원과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노숙인 전담 진료시설 대부분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진료에 투입된 현실을 감안해 정부가 한시적으로 제도를 손질하면서다. 이로써 지난달 말 기준 291개였던 노숙인 진료시설은 7만3398개로 늘어났다. 정부는 노숙인들의 의료 접근성이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정부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정부는 일단 감염병 ‘주의’ 단계 이상 경보가 발령됐을 때만 해당 의료기관을 이용할 수 있도록 단서를 달았다.
이와 관련해 반(反) 빈곤을 외치는 시민사회단체는 평등권과 의료접근권이 여전히 보장되지 않은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노숙인의 건강권을 제한하는 근본 원인인 ‘진료시설 지정제도’ 폐지가 우선이라고도 목소리를 높였다. 의사들 역시 정부의 일방적인 진료시설 지정은 ‘자율성 침해’라며 반발하고 있다.
◇‘감염병 단계 ’주의‘ 이상시 1·2차 의료기관 노숙인 진료’ 고시
보건복지부는 지난 22일 감염병 위기경보 단계 주의 이상 발령 시 요양병원을 제외한 의원급 1차 의료기관과 병원, 종합병원 등 2차 의료기관을 노숙인 진료시설로 지정하는 고시를 제정했다. 이런 조치는 향후 1년 동안 시행된다. 감염병 위기경보 단계는 ‘관심·주의·경계·심각’으로 구분되는데, 코로나19가 국내 본격적으로 확산한 2020년 초부터 심각 단계가 유지되고 있다.
각 지방자치단체가 보건소와 공공·민간병원 중 별도로 지정한 노숙인 진료시설은 코로나19 확산 이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의료시설이 부족해지자 기존 노숙인 진료시설로 지정된 대부분의 공공병원이 감염병 전담병원의 기능을 병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특정 진료시설만 이용할 수 있었던 노숙인들이 의료 사각지대에 놓이게 됐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노숙인들은 진료받을 권리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공공병원이 감염병 전담병원으로 지정되면서 병원 밖으로 쫓겨나는 노숙인도 많았다. 지난 2020년 12월 지정병원이었던 서울시 동부병원이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추가 지정됨에 따라 노숙인 환자들의 퇴원 조치가 이뤄지기도 했다.
정부의 해결책은 진료시설 확대였다. 하지만 노숙인 지원단체는 접근법이 틀렸다는 입장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외면한 미봉책이라는 쓴소리도 나온다. 물론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노숙인들이 진료를 받기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나 진료시설 지정제도가 폐지되지 않으면 이 같은 문제는 재난 상황 때마다 반복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노숙인 진료시설 의료급여 수급자 330명…전체 10%도 안 돼
2011년 제정된 노숙인 복지법에 근거를 두고 이듬해 6월부터 시행된 진료시설 지정제는 그동안 노숙인의 의료접근권을 제약하는 주된 원인으로 지목돼 왔다. 현행법상 의료급여(노숙인 1종) 대상에 포함된 노숙인은 지정된 진료시설을 이용할 경우 본인부담금이 면제된다. 다만, 의료급여를 받기 위해선 노숙인 일시보호시설이나 자활시설에 3개월 이상 거주해야 한다.
국가인권위원회 등에 따르면 노숙인 진료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의료급여 수급자는 전국을 통틀어 330여명에 불과하다. 이는 전체 노숙인 규모의 10%도 안 되는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노숙인 정책은 시설 입소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 거리 노숙인은 공공의료제도의 혜택을 누릴 수 없다.
의료급여에서 제외된 노숙인들은 각 지자체가 편성한 예산 범위 내에서 도움을 받고 있지만, 예산은 점차 축소되고 있다. 노숙인이 가장 많은 서울시조차 올해 노숙인 의료지원과 관련된 예산을 10%가량 감액했다.
또한 기존 노숙인 진료시설 중 약 80%는 보건소였고, 종합병원은 40곳도 채 되지 않았다. 서울과 경기도, 인천 등 수도권에 30% 이상의 진료시설이 몰려 있는 등 지역적 편차도 컸다. 광주와 세종시엔 노숙인 진료시설로 지정된 종합병원, 병원, 의원, 요양병원, 보건의료원이 전무했다.
정신과, 안과, 피부과 등 전문 진료과목이 개설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아플 때 병원을 찾아 먼 거리를 이동하거나 교통비가 없어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이와 관련해 인권위는 지난 1월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가 코로나19로 인한 재난 상황에서 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노숙인이 적기에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진료시설 지정제를 폐지하고, 노숙인의 의료급여 신청에 어려움이 없도록 관련 지침을 보완하라고 복지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이에 정부가 제도 마련에 나섰으나 노숙인 지원 단체는 답답함을 호소한다. 노숙인의 건강권 회복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게 그 이유다.
◇“복지부 고시, 인권위 권고와 근본적으로 거리 있어”
홈리스행동 등 49개 단체가 모인 빈곤사회연대는 “복지부 고시는 10년째 논란이 되고 있는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의 지속적인 운용을 전제하고 있어 인권위의 폐지 권고와는 근본적으로 거리가 있다”고 비판했다. 노숙인도 마땅히 누려야 할 평등권과 의료접근권의 보장을 정부가 ‘감염병 재난 시기’로만 국한한 것 역시 문제라고 강조했다.
노숙인 의료급여 대상자 포함 기준을 완화하거나 신청 창구를 확대하는 등의 접근성 개선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인권위에 따르면 17개 광역시·도 가운데 노숙인 일시보호시설이 없는 지자체는 13곳, 노숙인 자활시설이 없는 지자체는 4곳이다. 둘 다 없는 지자체도 4곳이나 된다. 의료급여 신청을 담당하는 일시보호 및 자활시설이 설치돼 있지 않은 지역의 노숙인은 기준을 충족하더라도 의료급여 혜택을 누릴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안형진 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는 “진료시설 지정제도 폐지와 관련해 다수의 국책·민간연구소가 꾸준히 타당성을 언급했음에도 정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며 “진정 노숙인의 의료접근성을 높이려 했다면 의료수급 혜택이라도 늘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어야 했는데 그런 노력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고 말했다.
안 활동가는 “노숙인 의료급여 수급자가 줄어드는 만큼 부담은 각 지자체가 떠안아야 한다. 문제가 지속될수록 중앙 정부와 지자체 간 책임 전가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도 강조했다.
◇“자율성 침해 행위” 의료계 반발도 해소해야
난관은 또 있다. 오미크론 변이 대유행에 따라 동네 병의원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19 대응 업무가 많아지면서 큰 규모가 아니고선 일반 진료는 보기 어려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숙인 진료는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도 존재한다.
의료계 반발도 부담이다. 대한의사협회는 복지부가 노숙인 진료시설을 강제로 지정한 것은 의료급여기관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노숙인 의료지원 제도개선방안 연구용역’ 등을 통해 중장기 개선방안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노숙인 의료수요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손질이 필요한 곳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필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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