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 어기고 딴 데 보고… 승객 수십명 태운 버스 ‘아찔한 질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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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운전 멈추고 늦추자]
<11> 사고 끊이지 않는 사업용 버스

42년 동안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아내와 여생을 즐기려 했던 최모 씨(73)의 부푼 꿈은 5월 11일 산산이 부서졌다. 이날 낮 12시 30분경 서울 은평구 입곡삼거리에서 길을 건너던 아내 이모 씨(68)가 신호를 위반한 시내버스에 치여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기 때문. 운전사 김모 씨는 적색 신호에 좌회전을 하다가 녹색 보행 신호에 길을 건너던 이 씨를 들이받았다.

사고 차량의 블랙박스에는 김 씨가 전방을 주시하지 않고 좌측 하단을 계속해서 응시하는 모습과 신호위반을 하면서도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는 모습 등이 고스란히 담겼다. 네 달째 병원에서 아내 곁을 지키고 있는 최 씨는 “어떻게 하루에 수백 명의 승객들을 태우는 시내버스 운전사가 그런 무책임한 운전을 할 수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 사업용 버스 사고 증가세

노선버스와 전세버스 등 사업용 버스로 인한 교통사고는 사망자 비율이 승용차 등 일반 차량에 비해 월등히 높아 더욱 치명적이다. 지난해 전체 교통사고 1만 건당 사망자는 1.4명이었던 반면 사업용 버스 사고의 사망자 수는 13명이었다. 택시, 화물차 등 다른 사업용 차량(3.8명)에 비해서도 3배 이상 사망자가 많았다. 차량 한 대당 탑승자가 많고 차체가 육중해 한번 사고가 나면 피해가 막심하다.

사업용 버스 교통사고는 증가 추세이기도 하다. 경찰청에 따르면 3년간 사업용 버스의 사고 건수는 2017년 4만4784건에서 지난해 4만7179건으로 매년 증가했다. 사고로 인한 사상자도 2018년엔 7만331명이었지만 2019년엔 7만3539명으로 소폭 늘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사업용 버스 사고는 10건 중 6건이 운전자의 사소한 과실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사업용 버스 사고의 56.9%는 운전자의 안전운전 의무 불이행으로 발생했다. 다음으로는 안전거리 미확보(9.8%)로 인한 사고가 많았다. 중앙선 침범, 과속, 신호위반과 같은 의도적 법규 위반 행위로 인해 사고가 나기도 하지만 무리한 끼어들기, 전방 주시 태만 등 부주의 행위가 교통사고로 이어진 경우가 절반 이상이라는 얘기다. 이성렬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공식 통계에는 집계되지 않지만 사고 접수 사례들을 살펴보면 고령의 마을버스 운전사들이 골목 운전을 하다 내는 사고도 자주 접수되는 유형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 안전과 비용 사이…해묵은 숙제

사업용 버스 교통사고는 버스업계의 해묵은 숙제다.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이 명확한데도 현실적인 이유로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사업용 버스 사고가 여론의 관심을 받게 된 대표적 사건은 2017년 7월 경부고속도로에서 발생한 7중 추돌 사고다. 당시 서울 서초구 서울 방면 경부고속도로 신양재나들목 인근에서 오산 소재 버스업체 소속 운전사가 낸 이 사고로 50대 부부가 숨지고 16명이 다쳤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해당 운전사가 사고 전날에도 19시간가량 버스를 운전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버스 운전사들의 열악한 근무 조건이 조명받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버스 운전사들이 격일제나 사흘 중 이틀 일하는 격복일제로 근무하며, 하루 근무 시간은 16시간이 넘어갈 때가 많다는 사실이 드러나 대중의 분노를 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선버스업은 2018년 주 52시간제 적용 업종에 포함됐다. 버스 운전사의 근로 시간이 탑승객의 안전과 직결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전세버스 등 비노선버스는 이 업종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노사정 합의로 근무 간 휴식 시간을 11시간 이상으로 유지하도록 했다.

문제는 버스의 배차 간격을 수요에 맞게 유지하면서 운전사의 근무 시간을 줄이려면 버스회사의 인력난과 재정난이 선결되어야 하는데 이 문제가 해소되지 않고 있다. 특히 서울 경기 지역을 제외한 지방 소재 업체에서는 주52시간제를 운영할 수 있을 만큼 운전사를 고용할 재정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이 때문에 2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주 52시간제는 300인 이상의 중·대형 버스업체에만 적용돼 있고 중소 버스업체들에는 계도에 머물고 있다.

전문가들은 “안전이 비용을 줄이는 최선의 투자”라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상진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안전에 투자하는 것이 당장에는 더 비용이 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큰 비용 지출을 막는 가장 확실한 투자”라며 “운전사의 근무 조건을 합리적인 수준으로 유지하고 차량을 정기적으로 정비하는 등 비용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안전운전 기사에 인센티브 주자… 사고 줄고 기름값 절감 ▼

운행기록계 첫 적용한 용남고속, 급제동-공회전 시간 등 모두 기록
우수 운전자에 해외여행 포상… 지자체 관여 준공영제도 해법 꼽혀

사업용 버스 운전사의 근로 여건을 개선하면서도 버스업체의 경제적 부담을 완화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안 가운데 성공적인 모델 중 하나로 꼽히는 게 ‘버스 준공영제’다. 민간이 버스 회사를 소유하되 공공에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둔 제도로 지자체가 버스업체를 지원하는 동시에 감시 기능을 수행한다.

준공영제의 핵심은 실제 수익과 상관없이 지자체가 버스업체에 적정 수준의 이윤을 보장해 준다는 데 있다. 버스업체가 돈 걱정 없이 운전사를 채용하고 노선도 촘촘하게 편성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안전과 이용자 만족도 둘 다 충족시키겠다는 것이다. 2004년 서울시를 시작으로 현재 경기권과 세종시 등에서 버스 준공영제가 운영되고 있다.

준공영제가 운영되고 있는 지역의 버스 운전사들은 일반 직장인들처럼 하루에 정해진 시간을 근무하며 한 주간 근무 시간이 52시간을 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다른 지방에 비해 사고율은 낮고 운전사들의 직업 만족도는 높다. 한 교통안전 전문가는 “준공영제만이 사업용 버스 사고 감소의 유일한 해법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버스 교통안전을 달성하는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준공영제를 운영할 만큼 탄탄한 재정을 가진 지자체가 많지 않다는 게 문제다. 재정자립도가 전국 광역지자체 중 1위인 서울시도 2016년 “보유 차량 수가 실제 수요에 비해 많아 불필요한 비용 지출이 크다”는 내용의 자체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지속가능한 준공영제 운영을 위해선 교통운임 인상이 불가피한데 여론의 저항이 예상되는 대책인 만큼 정부와 지자체, 민간업체 중 어느 쪽에서도 쉽게 추진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자체적인 인센티브 제도를 개발해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둔 업체도 있다. 수원 소재 버스업체인 용남고속은 14년 전 버스업체 중 최초로 운행기록계를 장착해 과속과 급제동 횟수, 공회전 시간 등 기록을 이용한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했다. 매년 노선별로 안전 운전을 한 우수 기사 1명을 선정해 해외여행을 보내주는 등 포상했다.

사고 감소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용남고속의 대물보험료율이 제도 시행 전 180%에서 150% 수준으로 떨어져 회사의 보험료 부담이 줄었다. 대물보험료율은 보험처리를 통한 배상액 대비 납부하는 보험료의 비율을 뜻하는데 사고 발생에 따른 물적 피해 가능성 등을 고려해 산정된다. 보험사가 보험료율을 낮췄다는 것은 그만큼 사고 가능성을 낮게 판단했다는 뜻이다.

부가적인 비용 절감 효과도 따라왔다. 용남고속의 연간 유류비 지출액은 과거 200억∼250억 원 수준이었지만 기름을 많이 소비하는 운전 습관이 줄어들어 10% 이상 기름값을 아끼게 됐다. 염태우 용남고속 상무이사는 “처음에는 운전 습관을 모두 바꿔야 하는 운전기사들이 난색을 표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사들의 만족도가 더 높다”고 말했다.

○ 공동기획 :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경찰청 한국교통안전공단 손해보험협회 한국교통연구원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tbs교통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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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취재팀

▽ 팀장 박창규 사회부 기자 kyu@donga.com

▽ 서형석(산업1부) 김동혁(경제부) 정순구(산업2부)

전채은(사회부) 신아형(국제부) 기자
#안전운전#신호#버스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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