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산재 사망자 자녀 특채는 정당”

  • 동아일보

원심 깨고 기아차 유족 손들어줘
“약자 보호… 고용세습과 달라, 기업 채용권한-구직자 취업기회
심각하게 침해했다고 볼 수 없어”… “공정 채용 어긋나” 반대 의견도

업무상 재해로 숨지거나 퇴직한 근로자의 직계가족을 회사가 특별 채용하도록 한 현대·기아자동차의 노사 단체협약은 정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유족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이 단체협약의 목적이 정당한 데다 실제 채용된 인원도 적어서 다른 구직자의 기회를 크게 침해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27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김명수 대법원장)는 기아차 공장과 현대차 연구소에서 23년 동안 일하다가 숨진 A 씨의 유족이 회사를 상대로 “노사 단체협약에 따라 A 씨의 장녀를 채용해 달라”며 낸 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A 씨는 1985년부터 2008년까지 기아차 공장에서 발암물질인 벤젠이 든 원료로 금형 틀을 닦는 일 등을 했다. 이후 현대차 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A 씨는 2008년 8월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 도중에 숨졌다.

1, 2심은 A 씨의 죽음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고 회사가 유족들에게 위자료와 치료비 등을 줘야 한다고 판결했다. 다만 장녀를 특별 채용해달라는 유족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족을 특별 채용하도록 한 단체협약은 다른 구직자들의 취업 기회를 뺏고 기업의 채용 권한을 침해하기 때문에 무효라는 판단이었다. 현대·기아차 노사 단체협약에는 업무상 재해로 숨지거나 장해등급 6급 이상을 받아 퇴직한 조합원의 직계 가족에 대해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채용하도록 돼 있다.

김 대법원장과 대법관 등 11명은 이 단체협약에 대해 “근로자의 특별한 희생에 걸맞은 보상을 하고, 생계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사회적 약자인 유족을 보호하는 규정”이라며 유효하다고 결론 내렸다. 대법원은 “유족을 채용하는 것은 정년퇴직자나 장기 근속자의 자녀를 우선 채용하는 것과는 다르게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채용 대상을 ‘결격사유 없는 근로자’로 한정하고 있어 무조건적으로 채용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채용의 자유가 심각하게 침해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 “공개채용과 다른 별도 절차를 통하기 때문에 구직자들의 채용 기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대법원은 채용의 자유와 기회 공정성이 심각하게 침해되지 않는 한 노사 스스로 합의한 협약을 사법부가 무효로 판단해선 안 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현대차와 기아차에 실제 특별 채용된 유족의 수를 근거로 이 조항 때문에 다른 청년 구직자들이 불이익을 볼 수 있다는 1, 2심의 논리를 반박했다. 기아차가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채용한 근로자 5281명 중 유족이란 이유로 채용된 인원은 5명으로 전체의 0.094%였다. 현대차가 같은 기간 채용한 근로자 1만8000명 중 유족 특채된 인원은 11명(0.061%)이었다.

민유숙, 이기택 대법관은 “청년 실업률이 지난해 22.9%인 현실에서 부모 일자리에 따라 자녀 일자리가 결정될 수 있다는 신호를 줄 수 있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두 대법관은 “노사 합의로 유족들에게 다른 방식의 보상책을 마련해줘야 하지만 그런 노력이 없는 한 법원이 공정한 법질서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도록 단체협약 조항을 무효로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현대·기아차의 노사 단체협약에는 “정년퇴직자 및 25년 재직한 장기 근속자 자녀에 대해

규정상 적합한 경우 우선 채용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이 일부 남아있다. 대법원은 고용을 세습하는 규정이란 비판이 제기된 이 조항에 대해선 따로 판단하지 않았다.

고도예 yea@donga.com·김도형 기자
#대법원#산업재해 사망자#자녀특채#기아자동차#유족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