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연명의료 중단 결정, 요양병원엔 먼 얘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10일 03시 00분


코멘트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한 말기암 환자 정현례 씨(오른쪽)가 직접 만든 팔찌를 딸과 함께 보이고 있다.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한 말기암 환자 정현례 씨(오른쪽)가 직접 만든 팔찌를 딸과 함께 보이고 있다.
#장면1. 짙은 방향제 냄새와 대소변 찌든 내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7일 경기의 한 요양병원 입원실. 중증 치매와 당뇨병을 앓고 있는 A 씨(72)가 산소공급기를 단 채 가늘게 호흡하고 있었다. 다른 환자 5명은 초점 풀린 눈으로 천장을 보거나 잠을 자고 있었다. 이들 중 4명은 임종이 다가와도 연명의료를 시도하지 않겠다는 ‘소생술 포기서(DNR·Do Not Resuscitate)’를 제출했지만 스스로 서명한 이는 한 명도 없다. 요양병원 관계자는 “가족이 ‘환자에겐 알리지 말라’며 대신 서명하는 일이 태반”이라고 귀띔했다.

#장면2.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한 말기 암 환자 정현례 씨(45·여)는 스스로 연명의료를 포기하기로 했다. 약에 취해 숨을 거두느니 또렷한 정신으로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DNR를 작성할 땐 가족, 주치의와 둘러앉아 어떤 연명의료를 포기할지 세세히 따졌다. 그의 곁을 지키는 딸 유준영 씨(23)는 “최근처럼 엄마와 깊은 대화를 오래 나눈 적이 없다”며 “마지막 사진을 예쁘게 남겨드리기 위해 화장법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 2월 4일 시행될 연명의료결정법 제1조에는 “임종을 앞둔 환자의 자기결정을 존중해 존엄과 가치를 보호한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정 씨처럼 이 법의 취지에 맞게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환자는 대형병원에 입원한 극소수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가족과 의료진이 연명의료 논의를 금기시하는 탓에 요양병원 및 요양원에 입원한 대다수는 A 씨처럼 자신에게 결정권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 김승희 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65세 이상 사망자 21만716명 중 숨지기 전 한 달 내에 요양병원에 입원했던 환자는 5만9852명이었다. 여기에 전국 요양원 입소자가 16만8356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적게 잡아도 한 해 6만 명 이상이 요양기관에서 임종한다는 게 의료계의 분석이다.

연명의료결정법상 환자가 거부할 수 있는 시술은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 4가지뿐이다. 하지만 실제 요양병원에선 이보다 광범위한 연명의료 중단 사례가 나온다. 기관지에 가래가 쌓여 호흡이 곤란해진 경우 식도 아래를 절개해 노폐물을 빨아들이면 살 수 있지만, 환자가 75세 이상 고령이라면 이런 시술을 선택하는 가족이 10명 중 2명꼴도 안 된다.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하실 환자이니 고통을 주지 말자’는 게 가족의 판단이다. 하지만 이런 연명의료 포기는 내년 2월부턴 연명의료결정법 위반에 해당해 최고 징역 3년에 처해질 수 있다. 반면 환자가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아도 가족의 고집이 앞서는 사례도 여전히 많다.

요양원도 사정이 낫지 않다. 요양원에는 의사가 상주하지 않고 촉탁의사가 월 2회 방문해 진료하기 때문에 사실상 당직 간호사가 임종기를 판단한다. 법률상으로는 주치의 1명과 전문의 1명이 함께 판정해야 한다. 서울의 한 요양원장은 “법대로 하려면 임종기 환자를 무조건 응급실로 보내야 하는데, 만약 이송 중 돌아가시면 그게 과연 존엄한 죽음인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이런 관행 탓에 2015년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평가한 한국의 ‘죽음의 질’은 40개국 중 32위에 머물렀다. 인구 10만 명당 호스피스 병상 수가 한국의 2배인 영국(1위)이나 내년부터 만성 통증환자가 영양급식까지 포기할 수 있도록 결정권을 강화하는 대만(14위)에 비하면 ‘존엄한 마지막’에 대한 인식이 걸음마 수준이다.

국가호스피스연명의료위원회에 참여하는 한 교수는 “요양병원 종사자에게 연명의료결정법의 취지를 적극 교육하고 건강보험에 ‘임종돌봄’ 수가를 따로 만들어 임종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조건희 becom@donga.com·김호경 기자
#연명의료#요양병원#존엄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