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SNS에서는]당신의 취향은 무엇입니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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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재수학원에서 만났던 사회탐구과목 선생님 K 씨의 연애담입니다.

영화배우 유해진 씨와 닮았던 K 씨에게는 본인 외모만큼이나 유별난 여자친구가 있었습니다. H대 미대를 다녔던 그녀는 보통 4차원이 아니었답니다. 축제 때면 연두색 부직포로 만든 애벌레 복장을 뒤집어쓰고 캠퍼스 바닥을 기어 다닐 정도였죠. 그녀는 엉뚱한 행동으로 K 씨를 자주 당황케 했습니다. 늦게까지 함께 술을 마신 날이면 다짜고짜 K 씨 손을 붙들고 그의 자취방을 습격했습니다. 내심 설렜던 K 씨를 향해 그녀는 “가까이 오면 죽여 버릴 거야. 신고할 거다”라고 외치며 큰대(大)자로 곯아떨어졌습니다. 오싹한 기운을 감지한 K 씨는 조용히 구석에서 잠을 청해야 했지요.

때로는 다소 공포감을 주던 그녀였지만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K 씨의 눈에 콩깍지가 씌었던 나날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습니다. 평소처럼 함께 술을 마시던 어느 날, 그녀로부터 폭탄 발언을 들었습니다.

“내가 왜 자기를 만나는지 알아? 다른 건 몰라도 당신 팔뚝, (K 씨의 팔을 덥석 붙잡으며) 여기 손목부터 팔꿈치 전까지의 딱 그 마디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래서 만나는 거야.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어.”

그녀가 미적 감각이 남다른 미대생인 건 알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답니다. ‘나를 만났던 이유가 이 팔뚝 하나 때문이었다니….’ 깊은 상심에 빠진 K 씨는 얼마 후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했습니다.

요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K 씨의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누리꾼들을 자주 발견합니다. 이른바 특정한 무언가에 제대로 꽂힌 ‘덕후(오타쿠)들’이라고 해야 하나요. 덕후질은 특히 아이돌 팬 사이에서 활발한 편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오빠’들이 마이크를 쥐고 있는, 때로는 다소곳이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있는 가냘픈 손들만 캡처해 올리거나 오빠들의 꼿꼿이 뻗은 등줄기, 섹시한 어깨선 등 신체 부위(?)별로 편집한 사진들을 스크랩합니다.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모습 혹은 특정 동작의 안무를 하고 있는 2∼3초 분량의 ‘짤방’ 등도 빼놓을 수 없지요.

여기서 포인트는 그들을 미치게 한 그 미묘한 표정과 동작, 스타일링 따위를 정확히 짚어내는 것입니다. 덕후들의 게시물에 ‘취향저격’이라는 신조어가 따라붙는 이유도 이 때문이지요. ‘나 이 헤어스타일 취향저격 당한 거가타ㅠㅠ’ ‘이 사진 진심 취향저격’ ‘목소리 취향저격 당함’ 등의 표현이 그 예입니다. 취향저격은 말 그대로 ‘본인의 마음에 드는 취향 혹은 스타일에 적중했다’는 의미입니다.

취향이 분명한 누리꾼들은 ‘덕밍아웃’(한 분야에 지나치게 심취한 사람임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일)을 외치며 자신이 애착을 가졌던 것들을 하나둘 SNS에 공개합니다. 맥주를 사랑하는 덕후 ‘맥덕’, 온갖 양말을 광적으로 사들이는 ‘삭스홀릭’ 등 덕밍아웃 종류도 다양합니다. ‘덕질’까진 아니더라도 자신의 취향을 당당히 밝히는 이들도 많습니다. 치킨이나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 먹는다는 ‘찍먹파’, 소스를 처음부터 부어 먹는다는 ‘부먹파’도 그중 하나입니다. 취향저격, 덕밍아웃, 맥덕, 삭스홀릭, 찍먹파, 부먹파 등 개인의 취향과 선호를 강하게 나타내는 이 같은 용어들은 얼마 전 국립국어원이 발표한 ‘2014년 신어’ 335개에 포함된 단어들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페이스북, 트위터 등 각종 인터넷 매체, 방송 뉴스 등을 조사해 수집한 결과이죠.

갈수록 사람들의 취향은 더욱 세분화되고, 또 구체화되는 것 같네요. 그런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확실하게 표현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여자친구의 진심을 알아차린 K 씨처럼 약간 황당하기도 합니다. 개인의 취향이야 물론 존중하겠다지만 솔직히 ‘아 뭐야…’ 하고 넘기게 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사람마다 ‘취향저격’ 당하는 지점이 워낙 제각각이기도 하거니와, 무언가에 ‘덕후질’을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가끔 ‘나 정도는 돼야 덕후지’ 하며 서로서로 경쟁하듯 포스팅을 해대니 거부감도 듭니다. 때로는 소스를 부어 먹기도, 또 찍어 먹기도 하는 나는 찍먹파도, 부먹파도 아닌 탓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다양한 개인의 취향들이 쉴 새 없이 업로드되는 온라인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나를 종종 발견합니다. 그럴 때면 SNS는 내겐 그저 시끄러운 세상일 뿐입니다. 그냥 좋다는 걸 표현하는 누리꾼들 앞에서 괜히 ‘진지병자’(어떤 일을 가볍게 넘기지 못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구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최지연 오피니언팀 기자 lima@donga.com
#덕후#덕밍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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