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중학교 일진회 가입 신고식은 “한번 빨아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16일 03시 00분


코멘트

10대들 본드흡입 유행처럼 번져

《 “한번 빨아봐.” 선배가 검은색 봉투를 내밀었다. 안에 담긴 정체불명의 끈적끈적한 물질. 봉투 쪽으로 머리를 가져가봤다. 코끝이 아렸다. 뇌가 쿵쾅쿵쾅 요동치는 느낌. 순간 아찔해 주저앉을 뻔했다. 이거, 이래도 되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냥 봉투를 바닥에 패대기쳐 버릴까. 이런 생각도 잠깐. 어느 새 빨아들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선배들 보는데 쪽팔리는 게 싫었다. 》
○ 일진회 중심으로 본드 불어

이진성(가명·14) 군의 ‘첫 경험’은 지난해 4월 그렇게 시작됐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상가건물 옥상에서였다. 그가 흡입한 물질은 환각 성분이 강한 톨루엔이 포함된 공업용 본드였다.

얼굴이 곱상하게 생긴 이 군은 초등학교 때부터 인기가 많았다. 합기도를 오래 배워 싸움도 곧잘 했다. 중학생이 되자 ‘일진회’(교내 폭력 서클)가 내버려두지 않았다. 반강제적으로 가입을 권유했다. 이 군도 싫진 않았다. 막연하게나마 일진 선배들이 멋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가입한 뒤 이어진 ‘신고식’이 본드 흡입이었다.

반년쯤 지속하던 본드를 지금은 끊었다. 일진회는 탈퇴했다. 하지만 대가는 혹독하다. 손발이 떨리고 심한 두통이 반복되는 등 후유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학교도 멀어졌다. 본드를 마시고 물건을 훔치다 붙잡히기를 수차례. 결국 학교까지 그만둔 것이다. 이 군은 “본드 빠는 게 얼마나 나쁜지 최소한의 상식이라도 있었으면 절대 손대지 않았을 것”이라며 “본드 때문에 학교 친구들을 잃었다. 앞으로도 막막하다”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일진회를 중심으로 본드에 손을 대는 10대가 늘고 있다. 특히 방학을 맞아 ‘본드 불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1990년대 10대의 본드 흡입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비화됐었다. 1997년 어느 사회복지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한 번이라도 본드나 부탄가스를 흡입한 경험이 있다’는 고교생이 5%에 이르렀다. 다행히 본드 흡입 청소년 비율이 꾸준히 줄었는데 최근 몇 년 새 다시 급격하게 늘어나는 추세다.

대검찰청의 통계에 따르면 유해화학물질관리법 위반으로 검거된 청소년(10세 이상∼19세 미만)의 수는 2008년 423명에서 2009년 501명, 2010년 876명, 2011년 1182명으로 늘었다. 인천경찰청의 ‘미성년자 유해화학물질 위반 현황’을 살펴봐도 환각물질에 손을 대 경찰에 적발된 10대의 수는 2009년 24명에서 2011년 374명으로 16배 가까이 증가했다.

본드 흡입의 중심에는 최근 숫자가 급격히 늘어난 일진회 등 폭력서클이 있다. 서울 A중학교 일진인 정모 군(15)은 “담배는 개나 소나 다 피운다. 본드 정도는 빨아줘야 뭔가 있어 보이지 않냐”고 했다. 신고식 과정에서는 물론이고 나름의 기념일에도 본드를 흡입한다는 게 그의 설명.

연령대도 낮아졌다. 고교생이 중심이었던 1990년대와 달리 지금은 60∼70%가 중학생이다.

○ 본드 흡입 발견 시 조기진화가 핵심

일단 본드 등 환각물질을 구하기 쉽다는 게 가장 문제다.

인천 YMCA청소년재단 청소년유해환경감시단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인천 시내 8개 구 165곳의 본드 판매업소(철물점, 문구점, 마트 등)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65곳(95%)에서 청소년에게 본드를 팔았다.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쉽게 살 수 있다. 성인 인증 절차는 거칠 필요가 없다.

본드 흡입의 폐해는 심각하다. 반복적으로 흡입하면 호흡기와 심혈관계에 큰 손상을 준다. 신경계에 미치는 파괴력도 크다.

가천대 의대 뇌과학연구소 김영보 교수는 “본드가 뇌의 지방질을 서서히 녹인다. 뇌가 망가지고 치매나 정신분열증도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본드에 중독된 청소년의 뇌는 정상 청소년의 뇌보다 훨씬 위축돼 제 기능을 못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런 피해를 막기 위해선 일차적으로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나쁜지 학교나 가정에서 알려주는 게 우선이다. 대부분의 청소년은 호기심에서 본드에 손을 댄다.

서울 강남경찰서 관계자는 “환각 물질의 위험성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만 알려줘도 본드 흡입 청소년 비율을 절반가량으로 줄일 수 있다”고 했다.

본드를 흡입했을 경우 ‘조기진화’가 필요하다. 본드는 중독성이 강해서다. 중독성이 더 심한 물질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는 점도 무섭다.

의학계에선 보통 5회 이상 본드 흡입을 반복하면 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청소년의 본드 흡입 사실을 알았다면 횟수에 상관없이 반드시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하라고 권한다. 물리적인 치료와 정신 교육까지 병행해야 완전히 유혹을 차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김형렬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본드 중독을 치료할 때 전문 의료진은 물론이고 부모까지 치료에 동참해야 완전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채널A 영상] 화장품 셔틀-집단폭행…남자 뺨치는 ‘여자 일진’


[채널A 영상] “폭행치사에 암매장까지…” 막 나가는 10대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청소년#본드 흡입#일진회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