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경북]노틸러스의 꿈 현실이 되다, 김용민 포스텍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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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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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의 힘찬 거스럼같이 중단없이 추구할때 이루어진다

김용민 총장이 워싱턴대 교수이던 2006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게 생명공학 빌딩을 소개하고 있다. 김 총장이 빌게이츠재단의 기부금을 유치해 건립한 것이다. 포스텍 제공
김용민 총장이 워싱턴대 교수이던 2006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게 생명공학 빌딩을 소개하고 있다. 김 총장이 빌게이츠재단의 기부금을 유치해 건립한 것이다. 포스텍 제공
김용민 포스텍 총장(59)의 리더십을 살펴보려면 세계 최초의 핵잠수함인 ‘노틸러스’와의 특별한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노틸러스는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이 1870년에 발표한 공상과학소설 ‘해저 2만리’에 나오는 잠수함. 바닷속 세계를 탐험하는 꿈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미국 해군이 1958년 만든 핵잠수함 이름을 노틸러스(앵무조개라는 뜻)로 지은 이유도 심해(深海)를 누비려는 꿈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해 8월 빙산이 가득한 북극 얼음 밑 바닷속으로 들어간 노틸러스는 96시간 동안 3000km가량 이동해 그린란드 북동쪽 대서양에서 물 위로 나왔다. 원자력을 활용하면서 거의 무한 잠행(潛行)이 가능할 정도로 진정한 잠수함 능력을 보여줬다. ‘해저 2만리’의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한 번씩 수면 위로 떠올라 숨을 쉰 뒤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기존의 잠수함 개념을 완전히 바꾼 사건이었다.

○ 노틸러스 핵잠수함의 충격

“용민아, 이 책 꼭 읽어봐라.” 제주 북초등학교 4학년이던 1962년 김 총장의 아버지 김기환 교수(당시 제주대 수의학과)는 어느날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너한테 필요한 내용”이라며 책을 건넸다. 노틸러스 핵잠수함의 항해를 소개한 내용이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영어책이었는데 사진이 많아 내용을 대략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큰 잠수함(길이 97m, 무게 4000t)이 어떻게 얼음 밑 바다에서 3000km나 갈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많이 들었고요. 이런 게 과학기술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뭘 공부하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전자공학을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서울대 약대를 나와 서울에서 제약회사를 하던 중 6·25전쟁 때 집이 폭격을 맞는 바람에 고향인 제주로 왔다. 1976년 제주대를 퇴직하고 1987년 별세했다. 김 총장은 10남매(4남 6녀) 중 막내다.

노틸러스에서 받았던 충격적 인상이 강했기 때문에 전자공학도가 돼야겠다는 마음은 대학 전공으로 이어졌다. 노틸러스와의 인연에서 싹이 튼 ‘소년 김용민’의 꿈은 꼭 20년 뒤인 1982년 워싱턴대 전자공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하나씩 실현됐다. 그는 “초등학생 때 노틸러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 인생도 지금과는 아주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했다. 이 일이 자신의 삶에 굉장한 ‘동기부여’가 됐다는 것이다.

제주 오현중에 다니는 동안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그는 “제주도의 명예를 걸고 서울 애들에게 실력으로 한방 먹여라”는 격려를 안고 서울의 한 명문고에 응시했다. ‘제주도의 천재’라고 불렸던 그가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자신과 주변의 기대가 너무 큰 상태에서 고교 입시 낙방은 견디기 어려운 좌절이었다.

2차 모집 고교에 진학한 그는 비로소 ‘겸손’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가족과 학교 선생님들은 “원하던 고교에 떨어졌다고 꿈도 사라지게 해선 안 된다. 더 열심히 노력해서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려는 자세가 훨씬 중요하다”고 격려했다. 김 총장이 ‘실패가 없으면 성공도 없다’는 가치관을 갖고 겸손한 자세로 ‘협력’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게 된 계기는 바로 고교 입시 실패였다.

○ 실패를 창의적으로 극복하는 노력

그는 “지금 돌아보면 고교 입시에서 떨어진 게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가장 큰 가르침”이라며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우수한 사람이 많구나 하는 마음에서 더 겸손하게 노력하는 자세를 갖게 됐다”고 말했다. 워싱턴대 교수 시절 실험실에 불이 네 차례나 나 전소되면서 연구 내용이 몽땅 사라지는 좌절을 겪었지만 “더 나은 성과로 보답하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보여주자 대학 측은 더 좋은 장비를 구입해줬다.

그가 실패에서 배우고 열정과 꿈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 같은 개인적 경험에서 나왔다. 어떤 실패가 그저 좌절로 끝나는지, 아니면 새로운 성공을 위한 토대가 되는지는 실패를 어떻게 활용해 발전시킬 것이냐는 노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는 “누구나 갈 수 있는 쉬운 길에는 실패도 없겠지만 새로운 길을 열어가려면 실패는 어쩌면 당연하다”며 “실패에 따른 좌절이나 실망을 잘 관리하는 능력도 고가 장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했다.

김 총장에게는 9세 때 겪은 ‘노틸러스 충격’부터 꼭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결같이 추구하는 일정한 유전자(DNA)가 차분한 말투에 묻어난다. 꿈을 하나씩 이뤄가려는 강한 열정이 그것이다. 두루뭉술한 꿈이 아니라 인내와 끈기, 열정, 도전, 노력, 자신감, 배려, 겸손, 실력이 골고루 버무려진 맛있는 비빔밥 같은 꿈이다. 노틸러스를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 그 가슴뜀을 이루고 싶어하는 동심(童心)이 와 닿는다.

○ 기초과학보다 중요한 문화적 토양

김 총장의 마음에는 개인이든 대학조직이든 ‘기본’ ‘기초’가 중요하다는 태도가 아주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총장 임기 몇 년 동안에 포스텍을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 명문대학으로 확고하게 만들겠다는 식의 거창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노벨상만 하더라도 기초과학연구가 튼튼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기초과학연구가 진정한 실력을 발휘하려면 ‘더 기초적인’ 문화적 토양이 반드시 형성돼야 한다는 신념이다.

“포스텍 교수들의 연구 능력이나 학생의 자질, 연구 시설 같은 지표는 일정 수준에 올라있습니다. 그러나 교육과 연구의 수월성(탁월성)을 협력적 분위기에서 진실되게, 윤리적 기반 위에서, 개방적이고 투명하게 밀고 나가는 토양이나 분위기는 부족하다고 봅니다. 개교 26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포스텍이 거둔 성과는 크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으로 성장하려면 이 같은 문화적 기초가 매우 중요한 투자라는 인식과 노력이 소중합니다.”

김 총장은 멀리 내다보면서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좌표 설정이 중요하다고 했다. 대학의 모든 구성원이 교육과 연구, 업무에서 어떤 단계에 있고 명확하게 무엇을 추구하는지 공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발전단계는 ‘굿 또는 베리 굿(good, very good)’은 ‘그저 그렇다’ ‘엑설런트(excellent)’는 ‘조금 낫다’ ‘아웃스탠딩(outstanding)’은 ‘참 좋다’ ‘유니크 또는 익셉셔널(unique, exceptional)’은 ‘유일무이하게 특출한’이다. 다소 막연하게 굿이나 엑셀런트한 상태를 추구해서는 안 되고 유니크하고 익셉셔널한 단계가 명확한 목표가 돼야 비로소 거목(巨木)을 꿈꿀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최종 단계를 위한 밑거름이 바로 그 문화적 토양이라는 것이다.

○ 교육은 연구의 어머니

그는 ‘연구중심대학’의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연구’를 교수들이 전공별로 논문을 열심히 쓰고 이를 토대로 산학협력을 활발하게 하는 수준에 그치도록 해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연구를 이 정도 범위에 한정하면 ‘교육’이 실종된다고 걱정했다. 연구는 마땅히 ‘교육의 지평’ 위에서 이뤄지고 교육에 스며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이 연구를 보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수가 ‘모든’ 면에서 학생들의 롤 모델(본보기, 거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한결같은 믿음이다. 그는 “교수들은 특히 학부 학생들의 배움을 향한 열정에 불을 붙여주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영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동료 교수뿐 아니라 학생까지 포함해 다른 사람의 장점을 잘 활용해 더 나은 연구와 교육을 하는 분위기는 세계적인 대학이 되기 위한 엄청난 재산”이라며 “내 자신도 만약 개인적인 연구에 몰두했다면 지난 30년이 지금보다 훨씬 부족했을 것”이라고 했다. 김 총장은 “그동안 발표한 논문 500여 편 가운데 100여 편은 동료들과 함께 작성했다”며 과학기술 연구에서 개방적인 협력을 강조했다.

○ 강을 거스르는 연어의 꿈

김 총장은 ‘연어’를 좋아한다. 넓은 바다를 헤엄쳐 다니다 산란기에 태어난 강을 따라, 곰에게 잡아먹힐 가능성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 본능적 절실함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그런 연어를 보면 가슴이 뛰고 열정이 느껴지지만 외로워 보인다고도 했다. 하지만 연어의 용감한 ‘거스럼’이 없이는 그 어떤 유니크한 경쟁력도 낳을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에게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이라는 노래가 있다”고 알려주자 아이처럼 좋아하면서 “그렇습니까. 빨리 배워 불러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연어의 힘찬 거스럼에서 소년시절 만난 노틸러스의 꿈을 느끼는 듯했다. 틈나는 대로 전국의 고교를 찾아 학생들을 만나는 그는 연어의 꿈과 열정 이야기를 꼭 들려준다. 위험하더라도, 불가능해보이더라도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자세가 없다면 다른 사람이 이미 수없이 지나간 ‘남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당장은 불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5년 뒤 스타가 되고 10년 뒤 슈퍼스타가 되고 20년 뒤 노바(샛별)가 되는 가능성을 중단 없이 추구할 때 과학기술연구의 노바인 노벨상도 자연스럽게 따라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렇다고 너무 조급하면 일을 망친다고 했다.

김 총장은 “대학은 빙하가 움직이는 속도만큼이나 느려서 갑작스레 방향을 바꾸려고 하면 타이태호처럼 사고가 생길 수 있다”며 “저멀리 넓은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조금씩 그러나 중단없이 방향을 맞춰 한걸음씩 나아가면 어느 단계에서 속도가 확 생긴다”고 말했다.
포스텍 전경
포스텍 전경
김용민 총장은 “진정한 세계적 연구중심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협력적 개방적 윤리적 토대 위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문화와 분위기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김용민 총장은 “진정한 세계적 연구중심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협력적 개방적 윤리적 토대 위에서 탁월함을 추구하는 문화와 분위기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 남은 연구비 16억원 총장 장학금으로 조성 ▼

제주 출신으로 1975년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 조교수로 임명돼 1990년 정교수가 됐다.

전자공학과 교수이면서 생명공학과 컴퓨터공학, 방사선의학과 교수를 겸임해 융합 연구를 주도했다. 생명공학과 학과장을 8년 동안 맡으면서 이 학과를 미국 대학 전체 학과 평가에서 최우수 그룹에 포함되도록 만들었다.

멀티미디어 비디오 영상처리와 의료영상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는 연구 성과를 산업으로 연결하는 데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2011년 저명한 학술단체인 IEEE(국제전기전자공학회) 산하 EMBS(의학생명공학회)가 산학협력에 탁월한 업적을 거둔 학자에게 주는 최고 권위의 모얼락상을 받았으며 후에 EMBS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빌게이츠재단에서 700억 원을 기부받아 워싱턴대에 생명공학 빌딩을 세웠으며 미국국립보건원(NIH) 연구비도 미국 내 최고 수준인 연간 260억 원가량 수주했다. 워싱턴대에 재직하는 동안 산업체의 흐름을 반영해 16개 교과목을 개발했으며 60여 개 기업과 산학협력을 통해 개인특허도 70여 건 확보했다.
김용민 총장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용감하게 차별화하라’는 뜻으로 쓴 손글씨.
김용민 총장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용감하게 차별화하라’는 뜻으로 쓴 손글씨.

김 총장은 올해 4월 ‘총장 장학금’을 만들었다. 워싱턴대 교수 때 일본 히타치사의 의료기기 개발 연구비 가운데 총장 부임으로 사용하지 못한 16억 원을 포스텍 장학기금으로 만들었다. 남은 연구비는 돌려줘야 하지만 워싱턴대와 히타치사가 그의 연구 성과에 대한 고마움으로 장학금 전환에 공감해 가능했다.

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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