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前총장, 학생들 우르르 데리고 왔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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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7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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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년 밥집’ 올해 문닫는 서울대 솔밭식당 나정혜 할머니

12일 서울대 관악캠퍼스 내 솔밭식당. 나정혜 할머니가 소나무 아래에 서 있다. 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12일 서울대 관악캠퍼스 내 솔밭식당. 나정혜 할머니가 소나무 아래에 서 있다. 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정운찬 총장(전 국무총리)이 학생들을 우르르 데리고 찾아오곤 했어. 그리고 그 제자들은 유학 갔다가 돌아오면 다시 우리 집을 찾아왔지….”

16일 서울대 관악캠퍼스 안에 있는 솔밭식당 주인 나정혜 할머니(79)가 국밥에 들어갈 콩나물을 다듬으며 정 전 총장 얘기를 꺼냈다. “정 총장은 교수 시절 한 달에 한두 번씩 찾아왔는데 총장이 되고 나서도 계속 찾아오더라고.”

○ 서울대 역사와 함께한 식당

솔밭식당은 교수회관 주차장 옆 소나무 숲에 자리 잡은 바닥 면적이 100m²(약 30평) 남짓한 건물이다. 식당 밖 솔밭에는 서너 명이 옹기종기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10개 정도 놓여 있다. 이곳에서 44년째 식당을 해온 나 할머니를 거쳐 간 서울대 학생 상당수가 지금은 어엿한 사회지도층으로 자리 잡았다. 서울대 이봉진 연구부처장은 “약학과 학생 시절 돈이 없으면 할머니 가게에 가서 장부에 외상을 달아 놓고 국밥 먹으면서 공부했다”고 회상했다.

할머니는 서울대 관악캠퍼스가 들어서기 7년 전인 1968년부터 이곳에서 식당을 했다. 소나무가 우거진 관악산 기슭이던 이곳은 당시 관악골프장이었다. 할머니는 골프를 치러온 저명인사의 비서나 캐디들에게 밥을 해줬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두세 차례 다녀가더니 어느 순간 골프장이 서울대로 변했다”고 했다. 고 박 전 대통령은 1969년 홍종철 문화교육부 장관, 최문한 당시 서울대 총장 등과 새 서울대 터를 찾으려 서울 곳곳을 답사했다. 이듬해 정부는 관악골프장 터에 서울대 종합캠퍼스를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골프장이 대학 캠퍼스로 바뀌는 변화 속에서도 할머니는 같은 자리에서 계속 식당을 운영했다. “서울대 건물을 지을 때 인부들 먹일 사람도 필요했고, 다 짓고 나서도 교수와 학생들 먹일 식당이 부족하다고 해서 이곳에 눌러앉게 됐지.”

이곳은 군사독재 반대 등 민주화시위를 하다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식당 주변이 소나무로 우거져 있어 외부 시선을 따돌릴 수 있었던 것. 나 할머니는 “학생들이 산으로 도망치다 여의치 않으면 ‘우당탕’ 소리를 내며 식당으로 들어와 숨었다”며 “경찰이 와서 학생들 봤냐고 물으면 무서워서 모른다고만 하고 숨죽이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줄 걸 그랬다”고 했다.

○ ‘가난한 학생들의 아지트’가 올해 문 닫아

16일 기자가 식당을 찾았을 때 식당 메뉴판에는 ‘잔치국수 2000원’ ‘콩나물국밥 3000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이 나이에 돈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 등록금도 많이 비싸다는데 주머니 가벼운 학생들이 편하게 와주면 난 그게 좋다”고 했다.

할머니는 20년 전부터 서울대에 매년 100만∼120만 원의 발전기금을 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몇억 원씩 척척 내는 분들에 비하면 나는 공부하는 학생들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할머니는 올해를 끝으로 식당을 닫는다. 서울대 생활협동조합 측은 “나 할머니가 팔순에 접어드셨기 때문에 건강상 올해를 마지막으로 계약을 종료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직 미련이 많은 듯 국밥 육수가 펄펄 끓는 솥단지를 국자로 저으며 말했다. “나 아직 2, 3년은 거뜬한데….”

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정운찬#솔밭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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