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격]<4>여론 형성 과정을 한 차원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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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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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에선 초등교부터 주제발표 필수 美에선 대학끼리 매주 토론대결
鬪論 아닌 討論
佛 가족-친구간 토론 일상화
美 대학에 디베이트 코치 둬

인터넷 아닌 정론
日 인터넷 얘기는 ‘소문’ 치부
중요 정보는 신문 등서 얻어

프랑스에서 학생들은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끊임없는 주제발표와 토론을 통해 어떤 주제에도 성숙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시민으로 교육받는다. 갓 입학한 프랑스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프랑스어 수업을 받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프랑스에서 학생들은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끊임없는 주제발표와 토론을 통해 어떤 주제에도 성숙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시민으로 교육받는다. 갓 입학한 프랑스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프랑스어 수업을 받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 프랑스 파리 15구의 초등학교 4학년생인 마리나 양은 지난해 두 차례 ‘엑스포제(expos´e)’, 즉 주제발표를 했다. 하나는 지리시간에 ‘스위스’를 주제로 한 발표였고 또 하나는 역사시간에 ‘르네상스’를 주제로 한 발표였다. 초등학교 4학년으로서는 버거운 주제였지만 스스로 자료를 만들고 친구들의 예상질문도 꼼꼼히 대비한 끝에 성공적으로 발표를 마쳤다. 이 같은 엑스포제는 프랑스의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거의 모든 학과에서 빠지지 않는다. 학생들은 학기 초부터 엑스포제 주제를 정하고 발표 몇 주 전 준비에 들어간다. 이런 과정은 대학교에서 논문을 쓸 때까지 계속된다. 어릴 때부터 합리적 문제 제기와 논박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교육과정이 정착돼 있는 것이다.
#2
지난해 미국 대학의 저널리즘학과로 유학을 간 박영민(가명·25) 씨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후 미국인들이 느끼는 인종의식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 누리꾼들의 반응을 검색하다 당황했다. 인종 문제와 관련된 이슈가 등장해도 개인 블로그 방문객이나 클럽 회원들이 나누는 논란으로 머무를 뿐이지 논쟁을 퍼 나르고 확산시키며 이슈화하는 ‘익숙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것. 박 씨는 “지난해 해리 리드 미국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 ‘피부색이 덜 검고 니그로 방언도 사용하지 않아 선거에 도움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며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누리꾼의 반응은 주요 언론사 사이트에 이따금 달린 ‘인종주의자’라는 반응뿐이었고 반응이 또 다른 반응을 부르는 경우는 보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두 사례는 우리 사회와 상이한 두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는 시민들이 감정이나 개인의 이익보다 논리에 입각한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교육체제다. 또 하나는 오보와 선동이 기능하지 않는 ‘차분한’ 인터넷문화다. 역설적으로 이는 ‘냄비’ ‘파벌’ ‘선동’으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낮은 ‘사회적 합의 형성의 국격’을 아프게 깨우친다.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는 사회적 갈등요소를 봉합하기 위한 경제적 비용이 국내총생산(GDP)의 27%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런 비용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은 뚜렷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 토론이 이끄는 사회


이영훈 고려대 불문과 교수는 1988년 프랑스에서 유학할 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가족이나 친구들이 나이와 학력 등의 벽을 깨고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고 있었던 것. ‘네가 뭘 안다고’ ‘너도 나이 들어 봐라’ 같은 윽박지름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었다. “끊임없이 자기 얘기를 하면서도 상대방 얘기를 귀담아듣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공원에서도 교양이나 정치적 토론이 자유롭게 이뤄지는 게 프랑스 사회의 모습이더군요.”

이와 달리 한국 사회는 토론이 아니라 투론(鬪論)으로 치달으면서 사회적 낭비 요인이 되기도 한다. TV 토론에서도 상대의 주장은 수용하지 않은 채 말꼬투리 잡기로 일관하다가 ‘토론’이 아닌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것으로 끝나기 일쑤다.

토론 방법을 가르칠 전문가가 부족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 교수는 “외국에서 의사소통의 방법 등을 가르치는 ‘스피치 커뮤니케이션’으로 학위를 받은 학자들도 귀국해서는 대부분 연구자금 지원이 원활하고 매체의 주목을 받는 매스커뮤니케이션으로 연구 방향을 바꾼다”며 “오늘날 한국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개인 간(Inter-personal)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지적했다.

성균관대 이상철 교양학부 교수는 “민간 주도의 자율적 토론회가 활성화돼야 토론문화가 발전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에는 CPD(Center for President Debate)라는 이름으로 스피치 학자와 전직 대통령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하는 단체가 토론을 주관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100년이 넘는 역사의 토론협회가 많고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유명 기업인이 이들 협회를 지원한다. 이 교수는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학교에 ‘디베이트 코치’를 두며 토론협회를 대학 기구 중 하나로 설치해 매주 학교끼리 축구경기를 하듯 토론을 펼친다”며 “정책이나 가치를 토론할 때는 형식과 절차가 다른데 이런 절차를 알고 지켜가야 계속 원점으로 돌아가는 소모적 논쟁이 벌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 정론이 이끄는 사회


한국 사회가 사회적 현안에 쉽게 합의점을 찾지 못해 평행선을 달리거나 쉽게 달아오르고 식어버리는 것은 평균적인 사회구성원들이 정보 취득 경로로 인터넷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데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 유럽 일본에서는 시민들이 다양한 생활정보를 얻거나 업무를 처리하는 수단으로는 인터넷을 활용하지만 사회 현안에 대한 정보와 의견은 대부분 신문을 비롯해 정확한 사실과 정제된 의견을 싣는 매체를 통해 얻는다.

일본에서는 ‘인터넷언론’이란 말 자체가 생소하다. 신문이나 방송 뉴스가 아닌,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얘기는 ‘소문’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며 그것이 신뢰를 보장하거나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한다. 국회 등 정책 결정의 현장에서도 신문이나 방송에서 언급되지 않은 뉴스가 의견을 형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사례는 없다. 한때 한국에서 ‘시민저널리즘’을 표방하던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가 2006년 일본에 진출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해 지난해 문을 닫기도 했다.

송현주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외국에도 이른바 ‘공공저널리즘’ 운동이 있지만 한국처럼 주류 언론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사례는 적다”며 “미국의 경우 (우파로 분류되는) 폭스뉴스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직접적으로 이 매체에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도 최근 인터넷 매체가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이는 기존 종이신문에서 일하던 기자들이 독립해 만든 저널리즘으로 엄격한 기준을 갖췄다고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이재경 교수는 설명했다. ‘프로기자’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만든 매체이기 때문에 엄격한 기준을 갖추어 높은 수준의 저널리즘을 구사한다는 것. 이 교수는 “서구 각국은 명예훼손 소송을 비롯해 오보에 대응하는 각종 법적 대응이 활성화돼 있어 앞으로도 걸러지지 않은 저널리즘은 존재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나는 무조건 옳고 남은 그르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 의사결정 비능률 해소하려면

동아일보가 지난달 국내 각계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의 국격’ 설문조사에서 전문가들은 나라의 품격과 관련한 8개 항목 중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합리성’에 가장 낮은 점수를 주었다. 감정 대립을 넘어 사회적 비용을 요구하는 의사결정의 비능률을 해소할 방법은 무엇일까.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상대방 말을 들으면 사회적 이익이 증가한다’는 것을 강자나 여유가 있는 쪽이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무조건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생각을 가진 상태에서는 기본적으로 토론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며 “이성적으로 상대방의 말을 듣고 내 주장을 수정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출발선”이라고 강조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다수결 원칙을 지키라’는 주장과 ‘소수에 대한 배려를 하라’는 주장이 맞서는 것이 한국 사회의 모습”이라며 “모든 사안을 다수결 원칙으로 해결할 수 없고, 모든 사안에서 소수에 대한 배려를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이를 구별해 사안에 맞게 적용하는 감각을 의식적으로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훈 고려대 불문과 교수는 “과거 정부 때 소통을 중시하면서 이익단체의 목소리가 분출됐다. 그런 분출이 커뮤니케이션의 단초이긴 하지만 사회가 성숙할수록 진지한 대화의 자리가 마련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주장만 하는 것이 관성화됐다는 것. 그는 “오늘날 대학사회에서도 커뮤니케이션 형태는 매우 일방적”이라며 “갈등을 조정하고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리더를 길러내는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소통의 품격을 높일 방법론으로는 여러 전문가가 토론교육의 중요성을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하병학 서강대 교양교육원장은 “누군가가 궤변을 펼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윤리적 태도를 취할 때 공동체 구성원들이 이를 판별할 능력을 갖추도록 교육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여러 대학이 도입한 토론 과목에서는 스스로 토론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토론을 지켜보며 평가하고, 이 평가가 객관적인지를 교수가 다시 평가하는 식으로 교육한다며 “토론에 참여하는 것 못지않게 토론을 관람하고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도록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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