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할머니들 900번째 수요집회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13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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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 놈들 사과하기 전까진 죽으면 안돼. 그때까진 안 아프고 건강하게 살 거야."

강일출(82) 할머니는 13일 아침에도 운동을 거르지 않았다. 강 할머니는 매일 아침 경기 광주시에 있는 위안부 할머니 주거시설인 '나눔의 집' 근처를 40분 정도 산보 한다. 이날도 운동을 끝내고 동료 할머니 두 명과 함께 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18년 동안 이어진 '수요집회'가 900번째 열리는 날이다.

"이 집회가 900번째 열렸다고 떠들썩하지만 난 기쁠 것도 없어. 1000회, 2000회가 열리더라도 사죄하기 전까지는 수요일마다 올 거야. 운동도 열심히 할 거고." 체감온도가 영하 20도에 이르는 강추위에도 강 할머니는 씩씩했다.

한파가 몰아쳤지만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동원에 항의하는 수요집회는 이날 예정대로 열렸다. 특히 900회라는 상징성 때문에 평소 참여 인원인 50여 명의 4배 가까운 200여 명이 모였다.

시민단체 등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4명의 할머니들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피켓 시위에 나섰다. 노란 종이에 '900'이란 숫자를 쓴 사람도 있었다. '나는 일본 정부로부터 공개 사과를 원한다'고 쓰여진 문구도 보였다. 이날 집회에 참여한 박웅서(27·대학생) 씨는 "오늘 처음 왔는데 벌써 900회가 됐다고 들었다"며 "일본 정부의 아무런 반응 없이 이 집회가 900회까지 계속된 것 자체가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집회 횟수가 길어지며 가장 큰 걱정은 역시 '살아있는 역사'인 할머니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세상을 떠나고 있는 점이다. 김동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국장은 "한국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강제동원 피해자 234명 중 이제 88명만 살아 계신다"며 "그나마 지난해에는 돌아가신 분이 근래 들어 가장 적은 5명에 불과해 다행"이라고 말했다.

이날은 강일출 박옥선(86) 길원옥(82) 이옥선(82) 할머니 등 네 분이 집회에 참석했다. 요즘 워낙 날씨가 추워 할머니들의 집회 참석도 여의치 않다. 할머니 8명이 함께 살고 있는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은 "동절기라 의사 소견에 따라 수요 집회 참석을 대체로 막고 있다"며 "이제는 젊은이들이 대신 집회에 나서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이날 참석한 박옥선 할머니는 작은 체구에 분홍색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도 할머니는 구호를 외칠 때 누구보다 높이 손을 들었고, 자원봉사자들의 "사랑해요" 외침에는 웃으며 박수를 쳤다. 박 할머니는 18세 때 친구가 "중국 바느질 공장에 같이 가자"고 제안해 따라갔다가 종군 위안부가 됐다. 해방되고 나서도 차마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2000년이 되어서야 국적을 회복하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그 후로 매주 수요일마다 여기 나와. 이제 다른 건 필요없으니 사과만 받아낼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어."

박 할머니는 오히려 함께 집회에 나선 사람들을 걱정했다. 박 할머니는 "900회 한다고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들 와서 도와주니 고맙지만, 추운데 나와서 너무 고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집회는 1시간 동안 계속됐다. 이들은 마지막에 '희망은 있다'는 노래를 불렀다. '밤새 헤매일지라도 숲 사이로 아침은 온다'는 가사에서 할머니들은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주한 일본대사관의 문은 900회 수요집회가 끝날 때까지 열리지 않았다.

박재명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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