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알찬내용으로 승부… 마케팅 따로 없다

  • 입력 2009년 6월 13일 02시 59분


43년간 시장 1위 ‘수학의 정석’ 저자
홍성대 상산학원 이사장

“매년 120만권 씩 지금껏 4000만권 판매
큰틀 유지하되 개정땐 10%씩 바꾸며 변화에 적응”

하루가 멀다 하고 제도가 바뀌는 국내 교육시장에서 무려 43년 동안 한 번도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제품이 있다. 학습 참고서인 ‘수학의 정석’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장년층이 학창시절에 끼고 다녔던 책을 빅뱅과 소녀시대에 열광하는 요즘 청소년들도 숙독하고 있다.

1966년 출간된 수학의 정석은 지금까지 누적 판매량이 4000만 권을 넘었고 지금도 매년 120만 권씩 팔린다. 오래된 책 한 권이 극심한 환경 변화와 경쟁자들의 거센 도전 속에서 1등을 고수하는 비결은 뭘까.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지난달 15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성지출판에서 수학의 정석 저자인 홍성대 이사장을 만났다.

○ 기본은 고수하되 문제는 부지런히 바꿔

대중에게 수학의 정석은 예나 지금이나 그다지 바뀐 게 없어 보인다. 전통을 고수한 게 장수의 비결일까. 홍 이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초판과 최신판을 비교하면 문제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보일 겁니다. 알게 모르게 꾸준히 개정을 해왔어요.”

국내 교육 과정은 5∼7년에 한 번꼴로 크게 바뀐다. 홍 이사장은 그때마다 2년씩 시간을 들여 직접 개정 작업을 했다고 한다. 수학의 정석이 처음 나오고 5년까지는 매년 개정했고, 대대적인 개정은 지금까지 6번 정도 했다는 설명이다.

“언제나 새로 쓰는 기분으로 하지요. 책의 전체 틀은 한결같아 보이지만 사실 크게 개정할 때마다 문제를 10% 정도 교체해요. 이 정도면 엄청 많이 바꾸는 겁니다. 평소에 떠오르는 좋은 문제들을 메모했다가 개정판에 넣습니다. 그런데 준비한 자료가 워낙 많다 보니 한자리에 새로 넣을 후보 문제가 수십 개나 돼요. 이놈을 넣을까, 저놈을 넣을까 고민하는 게 가장 어렵습니다. 주옥같은 문제들은 43년째 그대로 남겨뒀습니다.”

문제를 많이 교체했지만 책의 큰 틀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각 장에서 수학의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고, 이 개념을 익힐 수 있도록 상세한 풀이 과정을 넣은 ‘기본 문제’를 실은 뒤, ‘유제’와 ‘연습문제’로 단련하는 식이다. 입시에서 수학 과목이 5지선다형 위주로 바뀌면서 ‘기본편’ 문제의 25% 정도를 5지선다형으로 바꾼 게 그나마 눈에 띄는 변화다. 수학 시험은 단연코 주관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홍 이사장으로서는 많이 양보한 셈이다.

“수학은 논리적 사고력을 기르는 학문이에요. 그러자면 답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논리적으로 잘 전개됐느냐가 중요합니다. 최근 출제 경향에 맞게 책의 형식을 싹 바꿀 생각은 안 해봤어요. 수학의 정석이 만들어진 목적 자체가 문제를 찍는 요령이 아니라 수학의 기본기를 가르치려는 것이니까요. 이 책에 나오는 질문들은 대개 ‘골라라’가 아니라 ‘풀어라’ ‘구하라’ ‘증명하라’는 식입니다. 지루하고 진부하다는 이유로 문제 푸는 ‘과정’을 생략할 수는 없습니다. 책이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오지 않았나 싶어요.”

○ 촌스러운 디자인을 고집하는 이유

트렌디한 디자인으로 표지와 속지를 꾸민 화려한 참고서들 사이에서 투박하고 촌스러운 수학의 정석은 오히려 눈에 띈다. 정석 책의 표지는 지금까지 몇 번 바뀌기는 했지만 큰 변화가 없었다. 제목이 ‘數學의 定石’에서 한글인 ‘수학의 정석’으로 바뀐 정도다. 화려한 시각 디자인에 익숙한 요즘 청소년들의 취향에 맞춰 디자인을 확 바꿀 계획은 없을까.

“개정할 때마다 편집 담당자들이 그 얘기를 해요. 그런데 크게 불편하지 않다면 굳이 디자인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학생들이 ‘아, 40여 년 전에 나온 책이라 표지가 이렇구나!’라고 생각하면 그것대로 또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러다 지난해에는 편집 담당자들이 하도 성화를 하는 바람에 표지를 바꿨다. 단, 초판 이미지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5가지 디자인을 내보라고 주문했다. 고유의 브랜드 정체성은 고수하되 좀 더 세련된 디자인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새로 나온 표지 후보 중 하나를 고르기 위해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상산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소비자 조사’까지 했다.

○ 마케팅은 없다, 근본으로 승부하라

홍 이사장은 서점에 책을 공급하고 수금하는 영업사원을 단 한 명만 둔다는 원칙을 지켜왔다. 그는 “내 사전에 마케팅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책의 내용으로만 승부를 걸자는 생각입니다. 정석을 보면 참 쉽게 이해가 된다거나 문제 하나하나가 알토란같다 하는 반응들이 40년 넘도록 구전되고 있으니, 따로 돈 들이지 않고도 저절로 마케팅이 되지요.”

수학의 정석은 출판사가 판촉을 하지 않아도 친구들 사이에, 스승과 제자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저절로 입소문이 퍼진다. 김상훈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수학의 정석은 입소문 마케팅에 필요한 두 가지 조건을 확실히 갖췄기에 성공을 이어왔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조건은 제품 자체가 훌륭하다는 것이며, 두 번째 조건은 제품 소비에 ‘체험’이 개입된다는 점이다. 참고서나 영화, 교육 서비스 등은 소비자가 겉으로만 봐서는 쉽게 구입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그 때문에 대다수의 소비자가 앞서 체험해본 사람들의 의견에 크게 의존한다.

2001년 개정판 이후 수학의 정석에는 ‘도운이 이창형, 홍재현’이라는 문구가 추가됐다. 홍 씨는 홍 이사장의 딸로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이며 성지출판 기획실장인 이 씨는 사위다. 두 사람은 서울대 수학과 동기생으로 만난 부부다. “이제 건강에 신경을 써야겠다 싶어요. 나는 차츰 책에서 손을 떼고, 딸 부부가 개정 작업에 조금씩 발을 들여놓게 할 셈이죠. 둘만으로 부족하면 좋은 필진을 더 구하면 되고요.”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 홍성대 이사장은

홍성대 이사장(72)은 ‘수학의 정석’을 출판하는 성지출판 회장이다. 학교법인 상산학원 이사장도 겸하고 있다. 홍 이사장은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종로학원 등에서 수학 강사를 하던 중 26세에 ‘수학의 정석’을 쓰기 시작해 29세 되던 1966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으로 젊은 나이에 상당한 돈을 벌었다. 이후 학생들 덕분에 번 돈을 학생들에게 좋은 교육으로 보답한다는 뜻으로 전북 전주시에 상산고를 설립했다. 1981년 개교한 이 학교는 2003년 자립형사립고가 됐다.

국내 첫 고품격 경영저널 ‘동아비즈니스리뷰(DBR)’ 35호(2009년 6월 15일자)의 주요 기사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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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ue for Marketing/슬림한 것이 아름답다… 제품 수를 줄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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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기업 내부 구성원들이 부정행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해하거나, 구조조정 임금삭감 등으로 회사에 불만을 갖게 된 직원들은 유혹에 쉽게 흔들린다. 내부 제보는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내부 관리 기법이며, 그 정확도도 꽤 높다. 이 글에서는 기업 내부 감사와 부정행위 방지 전문가인 필자들이 내부 제보를 활성화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한다.

▼패션과 경영/명품의 명분―비싼 값 하네!

지 세계적인 건축가 렘 콜하스는 프라다의 의뢰로 한 달에 한 번씩 모양이 바뀌는 독특한 형태의 구조물 ‘트랜스포머’를 만들었다. 샤넬이 또 다른 유명 건축가 자하 하디드에게 의뢰한 ‘모바일아트’는 움직이는 미술관이다. 많은 명품업체는 예술가들과 손잡고 ‘우리는 턱없이 비싼 제품이 아니라 독특한 철학과 이야기를 지닌 제품을 판다’고 강조하고 있다. 예술과의 조우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지갑을 열 명분을 주는 셈이다.

▼Design Touch/場이 열렸다, 축제를 즐겨라

현대 도시의 공간에서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지면서 색다른 임시 구조물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올해 열린 하이 서울 페스티벌에서는 서울광장에 설치된 ‘오월의 궁’이 눈길을 끌었다. 이 작품은 광장과 거리, 주변 건물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소통의 구조체다. 축제의 공간을 서울광장에만 국한하지 않고 도심 전체로 무한히 확장하는 유기적인 조형물이다.

▼史記의 리더십/리더가 되려면 먼저 자신을 알라

중국 상나라를 건국한 탕 임금에게는 이윤이라는 뛰어난 참모가 있었다. 이윤은 ‘법군(法君)’ ‘전군(專君)’ ‘노군(勞君)’ ‘수군(授君)’ ‘등군(等君)’ ‘기군(寄君)’ ‘파군(破君)’ ‘고군(固君)’ ‘삼세사군(三歲社君)’ 등 9가지 리더의 유형을 논했다고 한다. 이른바 ‘구주론(九主論)’이다. 이윤의 구주론은 리더의 변화 내지 변질의 단계까지 보여주는 리더십 이론으로 오늘날까지 적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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