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 입력 2008년 4월 28일 02시 59분


인간을 대량생산하고 영혼까지 조절

종교 책 개인의 자유 말살한 세계국가

우리가 맹신하는 과학-문명의 발전이

어느날 그런 비인간적 사회를 만든다면?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난다. 어떤 짐을 꾸려야 할까? 누려왔던 많은 것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을 골라내야 한다. 옷가지는 챙겨야 하지만 이불까지 들고 가는 사람은 없으리라. 어디서나 꼭 요긴한 것, 나를 유지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절대 두고 가서는 안 되는 것을 정해야 한다. 목적지는 ‘멋진 신세계’다. 이 질문은 여행 끝까지 동행할 도반(道伴·함께 도를 닦는 벗)이다.

서기 2540년 미래 사회인 이곳은 ‘공유, 주체성, 안정’을 목표로 하여 전 세계가 하나의 체제로 구축되어 있다. 첨단 과학기술이 세계 단일 국가를 완성시킨 동력이다. 그곳에서의 과학이란 우리가 보아왔던 과학과는 차원이 다르다. 더 강하고 세련된 자동차를 만들거나 컴퓨터로 우주게임을 하는 정도가 아니다. 인간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품질을 조절하여 사회구성원을 의도대로 만들어내는 사회다. 하나님만 했던 일을 인간도 자유롭게 하는 사회, 신으로부터 인간이 독립하여 주체성을 확보한 사회다. ‘휴먼 창세기 시뮬레이션’ 여행이라 할 만하다.

이 미래 사회에서는 생물학의 진보 덕분에 인간조차 ‘보카노프스키 과정’이라 불리는 생산 시스템을 통해 제조해낸다. 기나긴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병’ 안에서 하나의 난자를 평균 72개로 분열시키는 방법은 사회 안정의 기초가 된다. 델타, 감마, 입실론으로 불리는 하층 계급을 대량생산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하나의 난자에서 생산된 한 명의 인간은 ‘정상’으로 분류되어 상류층인 알파와 베타 계급을 형성한다. 태아 시절부터 살아갈 계급을 결정하고, 영양분을 적절히 조절해준다. 제각각 자기 계급에 해당하는 선천적 능력을 부여받고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사회, 조화와 안정을 이루는 사회다.

과학의 집요함은 교육과 문화 전반을 압도한다. 인간인 탓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원초적 감정까지 없겠는가. 이 사회는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인간을 양성한다. 수면학습 원리와 신 파블로프식 조건반사 덕분이다.

“알파 계급의 아이들은 회색 옷을 입고 우리보다 공부도 열심히 해. 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니 알파 계급이 되기 싫어.”

아이들은 잠을 잘 때 베개 밑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반복해서 들으며 계급의식을 갖는다.

하층 계급의 아기들은 꽃과 책을 볼 때마다 사이렌 소리와 전기충격으로 고통을 당한다. 책-사이렌, 꽃-전기 쇼크는 단단하고 견고한 개념이 되어 마음 깊이 각인된다. 자연을 사랑하고 책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을 없앰으로써 일을 할 때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를 얻기 위해서다. 계급에 맞는 마음을 갖는 교육, 이것이 사회 안정의 두 번째 조건이다.

과학 능력으로 완벽하게 사회를 계획하더라도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육체를 가진 동물이지 않은가. 돌발적인 감정의 흔들림이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설렘 등을 어찌할까. 이에 대한 신세계의 발명품은 바로 ‘소마’라는 약물이다. 한알만 먹어도 10가지의 우울한 감정을 치료하며, 수치심이나 피곤함을 풀어주는 정신성 약품이다. ‘기독교와 술의 장점’만을 취했다는 신세계인의 자랑을 듣다 보면 영혼의 문제까지 조절하는 치밀함에 놀라게 된다. 인간의 모든 나약함을 물리친 이성의 승리다.

이만하면 솔깃할까. 국가 간 전쟁도 없고 사회 내부의 계층 간 갈등도 없고 모두가 즐거워하는 안정된 사회라니. 이 책은 우리에게는 있으나 ‘그곳에는 없는 것’을 자꾸만 비춰준다. 그곳 사람들은 결혼할 필요가 없고 가정을 꾸려 임신과 출산을 하지 않아도 된다. 병에서 세련되게 생산되므로 어머니와 아버지란 존재는 외설스러운 용어다. 종교와 성경이, 책과 문학이, 개인의 자유가 싸잡아 경멸받는 사회. 오래된 전통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회. 이곳은 인간답다 여기는 우리의 모든 것을 청소해버린 사회다. 우리를 비웃는 신세계의 얼굴을 느낄 때마다 마치 요요처럼 예의 그 질문이 떠오른다. 현대 문명은 미래로 가는 길에 어떤 짐을 꾸려야 할까!

과학은 우리를 어디까지 바꿀 것인가, 이 책은 그 끝을 보여주는 영리하고 우울한 판타지이다. 과학은 물질문명이나 환경만을 건드리지 않는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 그리고 인간 그 자체를 바꾸어버린다. 소설 속 여행과는 달리 한번 가면 돌이킬 수 없는 문명의 진로 앞에서 무겁게 결정해보자. 합리성의 결과가 인간다움을 도려낸 안정과 만족이어도 계속 이대로만 가면 될 것인지 근대문명의 기관차 앞에서 여전히 헉슬리는 묻고 있다.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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