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수용소의 …’

  • 입력 2008년 1월 14일 02시 58분


“힘없고 억울한 이들에겐

진실도 법도 모두 허구”

시베리아의 삭풍에 실려온

유형수들의 분노어린 절규

여러분도 들리나요

운동회가 열렸습니다. 청군과 백군이 있습니다. 운동회는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모습으로 열립니다. 청군과 백군은 서로 마주보며 긴 줄을 잡아당길 준비를 합니다. ‘시작’이라는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다리에 힘을 줍니다. 청군은 백군보다 수가 많은데도 훨씬 더 긴장한 모습입니다. 백군은 오히려 여유가 있어 보입니다. 자, 신호가 떨어졌습니다. 서로 줄을 잡아당깁니다. 어,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수가 훨씬 더 많은 청군이 우르르 넘어집니다. 백군은 잡아당기는 시늉만 하는 듯했는데 이겨버렸습니다. 이런 일이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모습으로 일어납니다. 어디에서냐고요? 바로 ‘그’가 ‘살고’ 있는 수용소입니다.

그의 이름은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입니다. 러시아 사람이지요. 슈호프의 죄목은 ‘반역죄’입니다. 조국 러시아를 배반하기 위해 독일 포로가 되어 첩보대로 활동했다는 것이 그의 죄목입니다. 그런데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슈호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2년 2월, 그가 속한 부대가 적에게 포위되면서 독일군의 포로가 됐습니다. 하지만 포로로 있었던 것은 딱 이틀뿐이었습니다. 다른 동료들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사건이 이렇게 탈바꿈되고 만 것입니다.

세상에 진실이란 게 있기는 할까요? 만일 그때 누군가가 슈호프의 말을 믿어줬다면, 그는 지금쯤 아내와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며 ‘오늘은 바람이 참 좋다’든지 하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트로이카 무늬와 사슴 무늬를 그려 넣은 벽걸이 카펫을 만들고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이제 이 모든 것은 꿈에 지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진실이 사라졌으니까요.

슈호프는 그 후로 8년째 수용소 생활을 하는 중입니다. 그는 이제 벽돌공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벽돌을 잘 쌓습니다. 날마다 강제 노동을 한 결과지요. 그는 수용소 안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몸소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수감원들이 형기를 얼마 남지 않은 그를 부러워해도 이곳을 나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요.

‘슈호프가 직접 본 일로, 옛날 전쟁 중에 형기가 끝난 죄수들을 모두 <추후 방침이 있을 때까지>, 그러니까 1949년까지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붙잡아뒀다. 게다가 더욱 심한 것은, 누군가 삼 년을 언도받았는데, 형기를 마치고 나서는 다시 오 년으로 추가 형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법률이란 것은 도무지 믿을 것이 못 된다. 십 년을 다 살고 난 다음에, 옜다 이 녀석아, 한 십 년 더 살아라 하게 될지, 아니면 유형살이를 보낼지 누가 알겠는가.’

여러분은 슈호프의 생각에 동의하나요? 법률은 도무지 믿을 게 못 되는 것일까요? ‘수용소’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법률이란 그저 허구에 불과한 것일까요? 슈호프가 처한 현실을 경험해 보지 못한다면 그의 생각을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겁니다. 매일 같이 이어지는 검문과 노동, 200g짜리 빵과 국을 타려는 아귀다툼 속에서 그가 법률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진정 그럴지도 모릅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저자 솔제니친은 1918년에 태어나 90세가 된 지금도 한때 자신을 추방했던 조국, 러시아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오랜 시간 자신의 조국 러시아가 겪었던 변화와 진통을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작가로서 자신이 경험한 현실을 그려내고 싶었을 겁니다. ‘슈호프’는 솔제니친이 직접 경험한 수용소 생활을 통해 만들어낸 분신으로 비참한 운명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보여 줍니다. 노동을 다 마치고 겉옷을 풀어헤쳐 검문을 받을 때 집으로 돌아가 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미소 짓게 되는 순간, ‘이 집(수용소)’ 외에 ‘다른 집(자신들의 집)’에 대해선 하루 종일 생각할 겨를도 없었음을 깨닫게 되는 그 순간의 비극적 현실을 보여줍니다. 허구 같은 현실을요.

200쪽이 넘는 이 작품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그리고 있습니다. 비극적인 수용소 생활 중에 아주 운이 좋았던 하루, 그 하루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마감되는지 여러분도 한번 지켜보는 건 어떨까요? 무자년 새해를 맞아 고전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시길 감히 권합니다.

이승은 학림 필로소피 논술전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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