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평등의 함정’에 빠진 노동계

  • 입력 2007년 7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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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문제로 회사와 갈등을 빚고 있는 이랜드 계열 홈에버 노조원들이 10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점에서 매장 입구를 점거한 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비정규직 문제로 회사와 갈등을 빚고 있는 이랜드 계열 홈에버 노조원들이 10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홈에버 월드컵점에서 매장 입구를 점거한 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상여금을 나눠 갖는 데 동의해 주세요.” 최근 안양시 공무원 노조는 다음 주 2006년분 성과상여금 지급을 앞두고 조합원들에게서 이런 내용이 담긴 동의서를 받고 있다. 지난해 근무평가와 다면평가 결과에 따라 차이가 나는 상여금을 한데 모아 직급별로 똑같이 나눠 갖기 위해서다. 현재 참가율은 90% 정도. 이번에 안양시 공무원(6급 기준)은 최고 등급인 S급은 264만 원, 중간인 A급 176만 원, 최하위인 B급은 88만 원의 성과상여금을 받는다. 월 기준으로 S급과 B급의 상여금 격차는 14만7000원 정도. 공무원의 전체 임금에서 상여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3% 정도지만 그 안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안양시 노조 관계자는 “현재의 평가 방식은 공정하다고 보기 어려워 상여금을 공평하게 나누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

공무원-교원노조 성과급 반납후 균등 분배

단순직종도 “정규직 되면 같은 대우 해달라”

정부 ‘양극화해소’ 강조 근로자에 환상 심어

선진국에선 직무-성과 따른 보수차이 당연

한국의 노동운동이 ‘형평성’이라는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

노조가 개인차가 나는 성과급을 거부하고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까지 같은 보상을 요구하는 일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어떤 일’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 임금 차를 두는 세계적인 임금 제도의 큰 흐름에 완전히 역행하는 움직임이다.

전문가들은 이른바 ‘양극화 해소’를 내세우며 근로자들에게 막연한 오해와 착각을 심어준 현 정부와 정치권도 이런 상황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 노동운동 현장마다 ‘똑같이 달라’ 요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로 심한 마찰을 빚고 있는 이랜드.

이 회사는 올해 들어 계약이 끝난 할인점 홈에버의 비정규직 1100여 명 가운데 정규직 전환을 희망한 500여 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나머지 600여 명은 정규직 전환을 거부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무늬만 정규직이지 임금은 정규직만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랜드 사측이 주로 계산대에서 근무하는 이들 ‘캐시어’를 정규직으로 바꾸면서 별도의 임금 체계를 도입해 기존의 정규직보다 낮은 임금을 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랜드 사측은 “캐시어 업무를 하는 사람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데도 막대한 처우개선 비용이 든다”면서 “상대적으로 단순 업무를 하는 이들에게 관리직 수준의 임금을 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처음’으로 최근 정부와 단체 교섭을 시작한 공무원 노조의 가장 대표적인 요구는 ‘성과급제 폐지’다. “일은 같이 하는데 분배는 개인별로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평가 결과에 따라 지급되는 교원 성과급을 거부하고 있다.

전교조는 지난해 약 750억 원의 성과급을 다시 모아 나눠가진 데 이어 올해도 반납된 성과급을 모아 봉사단체 등에 나눠 준다는 계획이다.

○ ‘차이’까지 ‘차별’로 보는 한국 노동계

올해 3월 비정규직 3000여 명의 정규직 전환을 결정한 우리은행에서는 아직까지 별다른 갈등이 없다. 우리은행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방식은 업무에 따라 여러 개의 직군(職群)으로 나눠 다른 임금체계를 적용하는 체제다.

영남대 이효수(노동경제학) 교수는 “우리은행 방식은 비정규직에게 고용 안정은 보장해 주지만 임금 증가에 따른 경영부담 때문에 정규직과 동일한 대우는 해 줄 수 없어 생각해 낸 타협책”이라며 “현실적으로 가능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중규직’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우리은행의 비정규직 전환 방식을 비난하고 있다. 창구 직원(텔러) 등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직원이 기존의 정규직 은행원과 같은 수준의 임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문제 삼고 있다.

이처럼 ‘형평성’을 이유로 노사가 갈등을 벌이는 상황은 선진국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강제로 전환하는 법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을 비롯해 대부분의 구미 선진국은 이미 근로자가 ‘직무’와 ‘성과’에 따라 사용자와 계약을 통해 임금을 받는 관행이 오래전부터 일상화돼 있기 때문이다.

○ ‘양극화 해소’ 정책이 불러온 착각

2002년 12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 후보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비중이 56%나 된다”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정부가 출범한 뒤 노 대통령은 비정규직 보호 법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른바 ‘양극화 해소’를 기치로 내건 뒤부터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 해소’를 노동 정책의 최대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현 정부는 ‘차별’ 해소에 초점을 맞추면서 맡은 직무나 개인의 능력 차에 따라 불가피하게 생기는 임금이나 처우의 차이에 대해서는 간과했다는 것이 노동문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박준성 성신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부는 그동안 비정규직 보호라는 측면을 강조하면서 근로자들의 과잉기대를 부추긴 것이 사실”이라며 “지금이라도 정부는 근로자들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알릴 것은 제대로 알리면서 근로자와 기업 사이에서 엄정한 심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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