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정훈]왕판사 목에 방울 달기

  • 입력 2006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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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권 시절 판사의 영장 기각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다. 공안사범의 영장을 기각하기라도 하면 조선 초 임금 자리를 빼앗긴 단종이 유배 갔던 강원도 영월 같은 오지로 발령을 받는 피해를 각오해야 했다.

당직판사가 영장을 기각하면 검사가 야밤에 수석부장판사 집에 찾아가 위압적으로 영장 발부를 요구하던 일도 종종 있었다. 대법원 수뇌부가 일선 법원의 형사수석부장판사를 통해 지침을 주던 일은 공공연한 비밀로 치부됐다.

최근 론스타 본사 임원에 대한 영장 기각 사태를 두고 서울중앙지법의 한 고위 법관이 “검찰이 청구한 영장을 100% 발부하는 게 법원의 업무가 아니다”라고 말한 배경에는 이런 과거의 통한이 배어 있는 듯하다.

민주화가 돼 가면서 영장을 둘러싼 법원과 검찰의 갈등은 팽팽한 힘겨루기의 양상을 보였다. 서울, 지방을 막론하고 다툼이 일었고 판사와 검사가 멱살잡이 직전까지 가는 일도 벌어졌다. 대개는 해당 지역의 법원장과 검사장이 나서 서로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충돌을 수습했다.

1997년 영장실질심사제가 도입되면서 영장을 둘러싼 역학관계는 역전됐다. 영장 발부 권한을 갖는 판사의 결정에 검찰을 비롯한 수사기관이 쩔쩔 매는 상황이다.

제도 자체도 진화를 거듭했다. 2002년에는 서울중앙지법의 경우 부장판사가 영장 심사를 맡도록 전담판사의 지위가 격상됐고, 올해 8월부터는 전국의 모든 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 때 국선변호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가 강화됐다.

시골에서는 “왕판사를 잘 모셔야 한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지역의 비리 토호들로서는 자신들의 생살여탈권을 영장전담판사가 쥐고 있으니 왕이 따로 있을 수가 없다.

검찰 내 최고 사정 부서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1990년대 후반까지 단 한 건도 영장을 기각 당한 일이 없는 무패 신화를 기록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4건에 1건꼴로 기각을 당하는 수모를 겪고 있다. 평균 영장 기각률보다 높아 중수부가 청구한 영장의 ‘마이너스 프리미엄’이 논란이 될 정도다.

이렇게 상황이 역전되면서 수십 년간 유지돼 온 법원-검찰 간 카르텔은 자연스럽게 무너졌다. 어떤 동맹이든 깨질 때에는 그렇듯이 법-검 동맹 역시 붕괴의 파열음이 크다.

대형 사건 수사와 관련된 영장은 쉽게 발부 받아 왔던 검찰은 “차려 놓은 밥상만 받아먹는 판사들이 수사에 인분을 뿌린다”고 험담을 퍼부었고, 영장전담부장판사의 입에선 “검찰이 공부 좀 더 하시라”는 자극적인 답사가 나왔다.

최근 수년간 판검사 임용 희망자의 사법연수원 성적 격차가 뚜렷하게 벌어지고 있는 판에 ‘공부 더 하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검사들로서는 뺨이라도 맞은 기분일 것이다.

그러나 “사법정의 실현에 법원이 왜 동참하지 않느냐”는 식의 우격다짐으로 대응할 일은 아니다. 법이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긴 하지만 정의감만 갖고 되지 않는 게 또한 법이기 때문이다.

사법부도 되돌아봐야 할 일이 많다. 사기를 당해 가정이 파탄지경에 빠져도 그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선 2, 3년씩 송사를 벌여야 하는 게 현실이다. 지금처럼 취약한 민사소송시스템 아래에서는 형사고소와 인신구속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국민의 법 감정을 바꿔 놓기가 어렵다.

김정훈 사회부 차장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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