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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3월 6일 18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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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1723∼1790)=영국 출신으로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한 뒤 은행원, 철도원, 문학평론을 하며 어렵게 생활했다.
귀족의 가정교사를 하면서 방문한 프랑스에서 경제학자 ‘세이’를 만난 뒤 경제학에 눈을 떴다. 세이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경제학자다.
스미스는 1776년 불후의 명저 ‘국부론(國富論)’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빵가게’의 비유를 통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을 처음 소개했다. 소비자와 빵가게 주인은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만 ‘가격’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회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스미스는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고 싶은 사람들의 동기를 풀어놓고 잘 활용하는 경제가 성공한다고 믿었다.
그는 정부가 시장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치안 유지 등 최소한의 역할만 하는 ‘야경(夜警)국가’를 이상적 국가로 봤다. 이 때문에 그의 이론은 ‘자유방임주의’라고 불린다.
▽카를 마르크스(1818∼1883)=18세기 산업혁명으로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늘고 근로조건은 열악해졌다.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 유대계 독일인 카를 마르크스였다.
그의 이론의 핵심은 ‘노동 가치설’이다. 모든 ‘가치’는 노동으로부터 나오며 물건의 가격도 제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노동력의 양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물건을 만들려면 노동력 외에도 자본, 기술, 소재 등이 필요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을 댄 기업이 이익을 내는 것은 근로자를 착취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생각을 기초로 나온 것이 ‘계급투쟁론’이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발표했다. 자본가 계층을 몰아내고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잡는 혁명을 이뤄내기 위해 세계의 노동자가 단합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마르크스는 빈부의 격차를 없애기 위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도 모두 똑같이 보상받는다면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이 때문에 모든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생산성, 효율성에 문제가 발생했으며 그 결과 대부분 붕괴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2∼1946)=1929년 미국에서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이론에 의문이 생겼다. 주가는 하루아침에 40% 이상 폭락했고 뉴욕 허드슨 강에는 매일 수십 명이 뛰어들어 자살했다. 생산은 많은데 사서 쓸 사람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는 ‘자유방임’ 상태로 둬도 시장이 문제를 해결하겠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 재정지출을 늘리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생각을 담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라는 책을 1936년에 펴냈다.
‘백약이 무효’한 상황에서 미국은 1930년대에 케인스의 처방을 채택했다. 유명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은 이 이론에 기초한 것이다. 결국 케인스의 처방은 효과가 있었고 그는 ‘세계 공황의 구원자’가 됐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1899∼1992)=케인스 이론에 입각해 경제를 운영하던 세계 각국은 1970년대 새로운 위기에 직면했다. 정부가 돈을 풀어도 경기는 살아나지 않고 물가만 올라가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 하이에크의 이론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사람들이 재능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시장에 최대한 자율을 주고 정부는 질서만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기며 사람들은 정부의 규제로 재능과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어 ‘노예의 길’로 가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하이에크의 생각을 ‘신(新)자유주의’라고 부른다.
중국 경제를 개혁한 덩샤오핑(鄧小平)이 1978년 하이에크를 불러 면담한 것은 유명하다. 식량부족으로 고민하던 덩샤오핑은 하이에크에게 해결책을 물었다. 하이에크는 “중국의 식량문제는 시장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이후 중국은 집단농장에서 생산해 똑같이 분배하는 대신 국유지를 농민에게 임대해 생산량의 일부만 정부에 내도록 바꿨다. 2년 만에 식량 생산량은 26% 늘었다.
하이에크는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예언했으며 죽기 전에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목격했다. 소련의 붕괴 소식을 아들이 전하자 90세가 넘은 하이에크가 “거봐, 내가 뭐랬어”라고 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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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Q:농업 개방하면 식량산업 몰락 않나 - A:농업 경쟁력 높이는 효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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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끝나자마자 학생들은 앞 다퉈 손을 들고 정 교수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특히 자유경쟁과 개방, 정부 개입의 최소화를 강조했던 경제학자들의 견해가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애덤 스미스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모두 자유경제를 주장했는데 차이는 무엇인가.(건국대 1년 노영웅 씨)
“크게 보면 비슷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스미스는 거의 완전한 자유방임을 생각했다. 경제는 개입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하이에크는 정부가 자연적인 질서를 형성하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잔디밭에 들어가지 말라면서 ‘ㄷ’자 형태로 돌아가게 하면 잔디를 밟는 사람이 나타나지만 잔디밭을 지나가는 것만큼 가깝게 길을 내면 자연적 질서가 생긴다는 뜻이다.”
―개방을 강조한 경제학자의 이론을 따라 농업을 개방하면 식량 산업이 몰락하지 않는가.(서울 고척고 2년 이재승 군)
“개방은 농업을 몰락시키는 대신 농업에 경쟁의 기회를 준다. 경쟁하다 보면 일부는 손해를 보겠지만 경쟁력을 갖추는 부분도 생겨난다. 화장품과 담배 산업을 보자. 개방했을 때에는 한국 화장품과 담배가 망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화장품과 훌륭한 담배가 생산된다.”
―한국의 유명한 경제학자로는 어떤 사람이 있고 어떤 이론을 갖고 있는가.(서울 돈암초교 6년 박수현 군)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인이 경제학을 배우는 것이 금지했기 때문에 서구의 경제학이 도입된 것은 광복 이후다.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목민심서’를 낸 다산 정약용이 바로 훌륭한 경제학자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세계 5대 학술지에 논문을 낸 사람은 30명 정도다.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한국의 경제상황을 토대로 한 한국적 경제학을 만들어내야 한다.”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3월 12일(토)에는 강원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이 ‘기업의 역할과 기업가 정신’이란 주제로 강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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