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자 사망사건'…11시간 동안 4차례 무차별 폭행

  • 입력 2002년 11월 6일 18시 27분



대검 감찰팀이 서울지검 강력부 홍경령(洪景嶺) 검사에 대해 청구한 구속영장에는 밀실에서 피의자를 ‘물리적’으로 제압해 자백을 받아내는 야만적인 강압수사의 진상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25일 오후 7시경 살인 혐의 용의자로 검거된 조천훈씨는 같은 날 오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까지 무려 11시간 동안 수사관 3명에게 머리와 다리 등을 얻어맞으며 밤샘조사를 받았다.

구속영장에 따르면 조씨에 대한 강압 수사는 검사와 수사관들이 조씨에게서 범행을 자백받기 전 미리 시나리오를 짜 역할을 분담해 진행됐다.

홍 검사는 수사관들이 돌아가며 피의자를 마구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는 등 심리적 육체적으로 제압해 범행을 시인했다는 보고를 받은 뒤에야 진술 조서를 작성하기로 사전에 묵시적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홍 검사와 수사관들이 독직폭행 치사 공범 혐의를 받는 것은 바로 이같은 이유에서다.

수사관들은 조씨가 술에 취한 채 25일 오후 9시경 서울지검 11층 특별조사실에 붙잡혀 들어와 범행을 부인하자 ‘기선제압’을 위해 왼쪽 무릎 뒷부분을 발로 차 바닥에 넘어뜨리고 이마 발 등을 무릎으로 눌렀다.

폭행의 강도가 높아진 것은 홍 검사가 조씨에 대한 1차 신문을 마친 26일 오전 2시 이후부터다. 이때부터 오전 8시까지 수사관 3명은 살인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 조씨를 차례로 조사하며 허벅지와 낭심 등을 가리지 않고 마구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린 것으로 밝혀졌다.

수갑을 채운 상태로 ‘엎드려뻗쳐’를 시키거나 머리를 바닥에 대게 하는 등의 군대식 얼차려도 이 시간에 집중됐다.

감찰팀은 검사가 수사관들의 가혹 행위를 묵인하고 조씨가 실신 상태에 이르렀는데도 사실상 방치한 것을 더 심각하게 보고 있다.

홍 검사는 26일 오전 6∼7시경 조씨가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또 오전 8∼8시반경 조씨가 신음 소리를 내고 숨을 몰아쉬어 검사실로 데려올 수 없다는 수사관들의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아무런 응급조치도 없었다.

홍 검사는 특히 이 무렵 조사실로 들어가 바닥에 쓰러져 있던 조씨를 침대에 누인 뒤 4시간가량 그대로 둔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지검 강력부는 26일 오전 6시반부터 낮 12시까지 조씨를 재웠다고 발표했지만 수사 결과 조씨가 온 몸을 얻어맞고 거의 실신 상태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지검 강력부 수사팀은 같은 날 오전 11시40분경 조씨의 건강상태가 급격히 악화돼 호흡곤란 증세가 나타난 뒤에야 119구급차를 불렀다.

검찰 관계자는 “홍 검사의 구속영장에 들어간 범죄 혐의는 우리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도 포함돼 있다”고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위용기자 viyonz@donga.com

▼검찰 '홍검사 영장' 반응▼

홍경령(洪景嶺) 검사의 구속영장이 청구된 6일 영장을 통해 검찰의 강압 수사 내용이 속속들이 알려지자 일반인은 물론 법조계에서도 충격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동안 홍 검사에 대한 동정론이 우세했던 검찰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으며 고문 수사 근절을 외쳐온 재야 법조계는 재발 방지를 위한 철저한 대응책 마련을 촉구했다.

이날 서울지검의 일선 검사들은 홍 검사 사건에 대한 언급을 극도로 꺼리는 분위기였다.

한 검사는 “다른 검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면서 “다만 검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우리 사회에 팽배하지 않을까 걱정이다”며 참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 강력부 검사도 “진실 여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 만약 홍 검사의 혐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같은 검사로서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박찬운(朴燦運) 변호사는 “영장대로라면 사실상 검사가 고문을 지시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확립과 더불어 고문 등 강압수사에 의한 진술에 증거능력을 과감히 제한하는 법원의 태도가 확립돼야 재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편 홍 검사의 사법연수원 동기생(21기) 29명이 공동변호인단을 구성해 무료변론에 나서기로 했다. 채종훈(蔡宗勳) 변호사는 “전세비가 모자라 서울에서 일산으로 이사했을 정도로 홍 검사의 형편이 어려운 만큼 동기생들이 적극 도울 예정”이라고 밝혔다.

채 변호사는 또 “운동권 출신인 홍 전 검사는 자신의 월급을 운동권 동료들에게 부쳐줄 정도로 인정이 많았다”고 소개했다.

홍 검사의 형 준영(俊英)씨는 “최근 동생이 형사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보도에 실신해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가 곡기를 끊은 채 종일 눈물만 흘리고 있다”며 “평소 ‘명예로운 검사’를 꿈꿔온 동생을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조천훈씨 폭행 사망일지▼

▽10월25일

오후 7시:서울지검 강력부, 조씨를 살인 혐의 용의자로 검거

오후 9시:검찰 수사관 채모 최모 홍모씨 등 3명이 조씨를 서울지검 특별조사실로 데려와 1차 폭행(무릎 이마 발), 살인 혐의 공범 최모씨 도주

▽10월26일

오전 1∼2시:홍경령 검사가 조씨 직접 조사

오전 2시 반:채 수사관, 조씨 2차 폭행(낭심 허벅지)

오전 3∼5시:홍 수사관, 조씨 3차 폭행(업어치기, 20분간 ‘원산폭격’, 허벅지 구타)

오전 5∼8시:최 수사관, 조씨 4차 폭행(엉덩이, 엎드려뻗쳐)

오전 6, 7시경:홍 검사, 조사실로 들어가 조씨가 무릎 꿇고 있는 것을 목격

오전 8시∼8시 반 사이:홍 검사, 조씨를 불렀지만 숨을 몰아쉬어 데려올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음, 조사실로 들어가 조씨 부축해 침대에 눕힘

오전 10시 반:홍 검사, 조사실로 들어가 조씨 건강 상태 확인

오전 11시40분:조씨 호흡곤란 증세, 홍 검사 등 119 불러 병원에 이송

낮 12시:조씨 병원 도착

오후 7시 반:조씨 사망 공식 확인

▽10월27일

오전 10시:국립과학수사연구소, 조씨 부검

오후 2시:서울지검 강력부 “조씨 구타 없었다”고 발표

▽10월28일:대검 감찰팀 사망사건 조사 착수

▽11월2일:국과수, 부검 결과 통보

▽11월4일:김정길 법무부장관, 이명재 검찰총장 동반 사표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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