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정선이 본 '한양진경'⑪]공암층탑

  • 입력 2002년 6월 21일 01시 33분


공암층탑(孔巖層塔·공암의 층진탑)

공암(孔巖)은 양천(陽川)의 옛 이름이다. 신라 경덕왕 16년(757) 주군현(州郡縣)의 이름을 한자식으로 고칠 때 이렇게 바꾸었다.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뒤에는 제차바위(齊次巴衣)라 했다. 이런 이름은 모두 한강 속에 솟아 있는 세 덩어리의 바위로부터 말미암았다. 차례로 서 있는 바위란 뜻으로 제차바위라 했고 구멍바위라는 의미로 공암이라 했던 것이다.

사실 이 그림에서 보듯 큰 바위 두 개에는 가운데에 구멍이 파여 있고 세개의 바위는 크기가 차례로 줄어든다. 그런데 그 옆 강기슭에는 바위절벽으로 이루어진 산봉우리 하나가 솟아있다. 이 산을 탑산(塔山)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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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보듯이 탑 하나가 산기슭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탑산(해발 31.5m) 자락이 강으로 떨어지면서 10여길이 넘는 바위절벽을 만들어 놓는데 수직 절벽 아랫부분에 천연동굴이 있어 수십명이 들어앉을 만하다. 이 석굴에서 양천 허(許)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이 출현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바위 절벽을 허가바위라 한다. 허선문은 고려 태조(918∼943)가 견훤을 정벌하러 갈 때(934) 90여세의 나이로 도강의 편의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군량미까지 제공했었다. 그래서 고려 태조는 허선문을 공암촌주(村主)에 봉하고 그 자손이 이 땅을 대대로 물려받아 살게 했다. 공암 허씨 또는 양천 허씨라 하는 이들은 모두 이 허선문의 후손들이다.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기 이전에 김포, 부평, 인천, 수원 등지에서 개성이나 평양으로 가려면 이 공암나루를 건너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었으므로 이 시절 한강나루 중에서는 이 공암나루가 가장 번성했다. 그래서 고려 태조도 이 나루를 건너 천안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에 현의 이름도 공암이라 하고 나루 이름도 공암진이라 했던 것인데 고려 충선왕 2년(1310)에는 고을 이름을 양천으로 바꾸면서 읍치(읍소재지)를 현재 양천향교가 있는 가양동 231 일대의 궁산 아래로 옮긴다. 그러자 공암에는 나루만 남는다.

공암이나 허가바위는 모두 자줏빛을 띤 바위다. 세 덩어리로 이루어진 공암은 광제(廣濟)바위 혹은 광주(廣州)바위라고도 부른다. 이것이 백제 때부터 부르던 이름이 아니었나 한다. 광제바위는 너른 나루에 있는 바위라는 뜻일 터이니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두고 한강의 물길을 장악하고 있을 때 이 공암나루는 너른 나루 중 하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바위라 하는 것은 광제바위가 잘못 전해져서 얻은 이름이리라. 그런데 광주에서 떠내려와서 광주바위라 한다는 전설을 붙이고 광주관아에서는 매해 양천현령에게 싸리비 두 자루를 세금으로 받아 갔다고 한다. 어느 때 이를 귀찮게 여긴 양천현령이 이 바위들이 배가 드나드는 데 거치적대니 광주로 다시 옮겨가라고 하자 광주 아전들은 다시는 이 바위를 광주바위라고 주장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광주바위 즉 공암은 70년대까지 한강 물 속에 그대로 잠겨 있었고 허가바위 굴 밑으로는 강물이 넘실대며 스쳐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80년대 올림픽대로를 건설하면서 뚝길이 강속을 일직선으로 긋고 지나자 이 두 바위는 육지 위로 깊숙이 올라서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구암 허준((龜岩 許浚·1546∼1615)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구암공원 한 귀퉁이에 볼품없이 처박혀 있다.

수천년 동안 한강물과 어우러지던 운치 있는 풍광은 이제 이 그림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산기슭에 남아 있던 탑은 일제강점기에 양천우편소장이던 일본인이 양천우편소에 옮겨놓았다는 데 현재는 누구도 간 곳을 알지 못한다.

영조 16년(1740) 비단에 채색한 23.0×29.4cm 크기로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서영아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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