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현주소]3화

  • 입력 2001년 1월 27일 14시 28분


▼여성 억압=자연 파괴▼

최씨는 이 얘기를 하며 한 가지 ‘주의사항’을 덧붙였다.

“여성성 회복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것을 성 역할 구분에 따른 여성성과 혼동해선 안 된다. 에코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여성성은 순종성이나 소극성 같은 부정적인 여성성과 구분해야 한다.”

또 정부의 여성정책에 대해 “예전엔 가출소녀나 윤락녀 미혼모 등 주로 사회적 약자 위치에 있는 여성에 대한 정책이 많았는데, DJ 정부 들어선 보통 여성들의 고충을 해결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씨에 따르면 그간 정부의 여성정책은 대개 형식적이고 신념이 없는 것이었다.

“한 예로 보육시설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자 정확한 수요를 따지지 않고 여기저기 마구 세웠다. 그 결과 설립신고만 해놓고 운영을 못 하는 보육원이 많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보육원장 중에 자살하는 사람도 나오고 원장들에 대한 자격 시비도 일었다. 국민연금기금에서 지원했는데, 돈은 돈대로 나가고 실효도 없는 정책이었다.”

최씨에게 몇 가지 이슈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먼저 호스트바.

“남자들이 룸살롱에 가서 여성 접대를 받으니 여자들도 똑같이 호스트바에 가서 남성 접대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룸살롱은 필요악으로 용인하면서 여성이 술집에 가 남성의 서비스를 받는 데 대해선 거부감을 갖는 불합리성을 문제 삼는 것이다.

법적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는가. 다시 말해 호스트바에 가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갈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호스트바 논리는 낙태에도 적용된다.

“60년대 유럽에서 일어난 여성운동의 시발점이 바로 낙태에 대한 권리선언이었다. 한 여성이 군중 앞에서 ‘나 낙태했어. 불법시술 했어’라고 당당히 외쳤다. 그러자 그 동안 숨죽여 지내던 많은 여성들이 이에 동조하고 나섰고 그것이 여성운동의 불길로 번져 나갔다. 낙태의 윤리성 논쟁과는 별개로 내 몸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인권의 문제다.”

최씨에 따르면 최근 페미니즘의 조류는 기계적인 남녀 평등주의에서 벗어나 남녀의 성 차이를 인정하되 여성성의 장점을 강조하는 쪽이다. 남성을 억압의 요인으로만 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해야 할 대상으로 감싸안자는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즘 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선 남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지난해 12월28일 MBC ‘100분 토론’에서는 ‘여성이 말하는 2000년 한국’이라는 주제를 두고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자 5명과 방청객 모두 여자로만 구성된 이 토론회에서 방청석에 앉아 있던 한 여성이 질문시간에 불만을 터뜨렸다.

“미혼여성이나 사회생활하는 여성들, 또 정치하는 분들한테 해당되는 얘기만 한다. 여성 중엔 전업주부가 많은데 전업주부가 가진 문제는 완전히 배제된 것 같아 안타깝다.”

아줌마닷컴(www.azoomma.com). 다른 여성 인터넷 사이트들과 달리 오로지 전업주부를 대상으로 가정과 관련한 종합정보를 제공하고 교육과 상담도 하는 토털 사이트다. ‘100분 토론’ 때 방청석에서 불만을 터뜨린 여성이 바로 ‘아줌마닷컴’의 대표인 황인영씨(34)다.

▼가사노동 가치를 인정하라▼

1월6일 오후 2시. 서울 도곡동에 있는 ‘아줌마닷컴’ 사무실에는 10여 명의 직원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아줌마닷컴’이 문을 연 것은 지난해 1월. 그해 3월부터 정식 서비스를 시작했다. 사무실 한가운데 놓인 타원형 탁자에 황씨와 마주앉았다.

“솔직히 페미니즘이 뭔지 잘 모른다. 그런데 여성운동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우리나라에는 직장여성이나 사회활동하는 여성만 있지 가정주부는 없는 것 같다. 가정일도 직장일 못지않은 가치를 갖고 있지 않나. 그들의 권리도 찾아줘야 한다.”

황씨는 전날 몸살 기운이 있어 입원을 했었다고 한다. 몸에 아직 열이 남아 있는지 어느 순간 팔을 걷어붙였다.

10년 동안 직장생활을 했던 그가 결혼한 것은 32세 때인 1999년.

결혼생활은 최씨가 미혼 때 가졌던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바꾸길 요구했다. 많은 주부가 자신을 죽이고 살아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생활에 치여 억눌린 아줌마들의 욕망과 생각과 ‘끼’를 마음껏 쏟아붓고 승화시키는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정보화시대에 인터넷은 여자들에게 큰 힘이다. 전업주부들은 인터넷을 통해 사회 참여할 수 있다. 여론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아줌마닷컴’은 지금 그 일을 해내고 있다.”

‘아줌마닷컴’은 현재 2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회원들은 하루 평균 1시간 반 동안 사이트에서 머문다. 회원 연령대를 보면 30대가 절반을 차지하고, 20대, 40대가 각 20%씩, 나머지는 50대 이상이다. ‘아줌마닷컴’에서 실시한 각종 설문조사 결과와 토론 내용을 보면 주부들의 의식 변화를 한눈에 알 수 있다.

혼전순결에 대한 논쟁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지킬 필요 없다’는 의견이 과반수를 넘었다(56%). 호스트바 출입에 대해선 남자들이 먼저 유흥업소 출입을 자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백지영씨 사건에 대해선 초기엔 백씨를 비난하는 의견이 많았지만 나중엔 ‘인권 침해’ 관점에서 보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다.

한편 설문조사에 따르면 남편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가사에 비협조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 해 동안 남편이 설거지를 도와준 횟수를 묻는 질문에 ‘거의 없다’라고 답한 주부가 가장 많았다(44%). 이어 ‘명절 때나 특별행사 때 몇 번 도와줬다’는 응답이 23%를 차지했다. 그 다음은 ‘한 달에 한두 번 도와준다’(17%), ‘일주일에 한두 번’(13%) 순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4%는 ‘거의 매일 도와준다’고 대답했다.

황씨에 따르면 주부들이 원하는 여성해방은 소박하다. 가사노동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내 가사노동을 돈으로 환산하면 남편 급여의 몇 %를 차지할 것으로 보는가’ 하는 설문조사 결과가 흥미롭다. 응답자의 81%가 ‘50% 이상’이라고 대답했다. ‘아줌마닷컴’의 출판팀장 임원영씨(40)는 가사노동의 가치를 강조했다.

“아줌마가 즐거워야 가정이 행복하다. 아이 키우는 일도 직업이다. 참된 페미니즘이라면 그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서 남편들을 개조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식들부터는 고쳐나갈 수 있다. 시어머니들도 마찬가지다. 아줌마들의 의식이 바뀌고 있으므로 20∼30년 후엔 시어머니 문화도 바뀔 것이다.”

▼궁지에 몰린 남성들▼

꾸준한 여성운동의 결과로 우리나라 여성들의 권익은 예전에 비해 크게 신장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법제 개선보다 중요한 것은 남녀 관계에 대한 인식의 변환이다.

통계로 보면 우리나라는 ‘야만국’ 소리를 들을 만하다. 우리나라의 성폭력 발생률은 세계에서 셋째다. 가정폭력 발생비율도 내놓고 얘기하기 부끄러울 정도다.

가정법률상담소가 발표한 1996년 상담통계에 따르면 여성의 이혼사유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것이 남편의 폭력(36.2%)이었다. 그 다음이 부정행위(18.5%)였다. ‘서울여성의전화’는 1999년 1월부터 3월까지 총 2170건을 상담했는데, 그 유형을 분석한 결과 성폭력이 498건(22.95%)으로 가장 많았고, 가정폭력(471건·21.71%)이 그 뒤를 이었다.

‘아줌마닷컴’에 따르면 주부들에게 인내는 더 이상 미덕이 아닌 듯싶다. ‘참고 살아라’보다는 ‘싸워라’ 또는 ‘싸워서 바꿔라’, ‘그래도 안 되면 이혼하라’는 의견이 대세라고 한다.

호주제 폐지 운동, 부모 성 같이 쓰기 운동, 부부재산 공동명의제 운동….

여성들의 칼끝은 서서히 가부장제의 급소 쪽으로 다가서고 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해방은 곧 남성해방이라고 속삭인다(?). 남자들이여! 성벽 위에서 돌을 굴릴 것인가, 아니면 성문을 열고 여자들을 맞아들일 것인가.

조성식/신동아기자 mairso2@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