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페미니즘 운동의 현주소]2화

  • 입력 2001년 1월 27일 14시 18분


▼아름답고 방자한 자궁▼

1999년 9월엔 제1회 월경 페스티벌이 열렸다. 고려대를 비롯한 4개 대학 연합 여성문화기획팀인 ‘불턱’이 주최한 행사다. 연극과 월경 축하파티로 구성된 이 행사의 주축은 대학생들이었지만 초경을 맞은 초등학생에서부터 폐경기의 중년 여성도 참가할 수 있도록 파티장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영 페미니스트들의 ‘반란’은 지난해 9월29일 마침내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유림과 정면충돌했다.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그룹인 ‘입김’의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에 대해 ‘전주 이씨 종친회’ 등 유림 세력이 방해하고 나선 것.

‘아방궁’이란 ‘아름답고 방자한 자궁’의 약자. ‘입김’ 회원들은 이날 ‘다리 벌리고 앉지 마라’ 등 각종 금기 언어로 만들어진 ‘∼마라 풍선’을 만들어 터뜨리고, 질과 자궁 모양을 본뜬 ‘탄생 터널’을 통과하는 의식을 통해 여성 몸의 사회적 의미를 드러낸다는 계획이었다.

이들이 행사장으로 종묘를 선택한 이유는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장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전주 이씨 종친회를 비롯한 유림 세력 200여 명은 이날 행사장에 몰려가 욕설을 퍼부으며 ‘입김’ 회원들의 그림 그리기를 방해함으로써 행사를 무산시켰다.

황오씨에 따르면 ‘if’ 사무실엔 유림 세력 또는 남성우월주의자로 여겨지는 남자들의 항의·협박 전화나 이메일 공세가 끊이지 않는다.

황오씨는 문화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에 대해 “남성 지배이데올로기로 굳어진 생활습관, 관습까지 문제 삼는 것”이라며 “여자가 콘돔을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풍토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if’가 여성문화운동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여성신문은 전통적인 여성문제, 곧 정치·사회적 여성 차별 문제를 꾸준히 환기시키며 여성의 권익과 인권 문제를 거론한다.

1월4일 오전 11시. 서울 정동에 있는 여성신문 편집국을 찾았다. 정희경 차장(35)은 “페미니즘 문제는 휴머니즘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며 여성운동에 대한 일반 언론의 논조를 비판했다.

“여성운동을 남성계와 여성계의 대립 차원에서 바라보면 안 된다. 그런데 언론이 자꾸 싸움으로 몰고 간다. 남녀 모두의 의식 변환이 중요하다.

역차별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여성 문제를 인권 문제로 보지 않고 밥그릇 싸움 정도로 인식하는 무지 탓이다. 민법에 규정된 여성의 지위가 얼마나 낮은지 실생활에서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평생 그 문제의 심각성을 모른 채 살아간다.”

여성신문이 선정한 ‘2000년 여성계 10대 뉴스’를 보면 지난 한 해 동안 일어난 여성 관련 주요 사건을 알 수 있다. ▲군 가산점제와 사이버테러 ▲장애여성 성폭력 수면 위로 ▲여성 국회의원 최다 등원 ▲‘정선호 사건’ 가정폭력 이슈화 ▲지도층 성희롱 사건 잇따라 ▲호주제 위헌소송 돌입 ▲여성부 신설 현실화 ▲군산 윤락가 화재사건 ▲비정규직 여성 노동권 확보 ▲국제여성법정 성공리에.

이중 호주제 폐지와 군 가산점제에 대한 논쟁은 올해에도 계속될 전망이다. 여성단체연합은 호주제 폐지를 올해 추진할 4대 핵심사업 중 하나로 선정했다. 여성단체협의회가 밝힌 10대 주요 사업계획에서도 이 문제는 맨 앞을 차지하고 있다. 여성단체와 일반 시민단체 및 시민들로 구성된 호주제폐지시민연대는 지난해 11월 서울가정법원에 위헌법률소송을 제기한 후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현행 호주법에 따르면 이혼한 여성이 자녀를 데리고 사는 경우 그 자녀는 아버지의 성을 계속 써야 하므로 어머니의 호적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 이혼한 여자가 전 남편의 자녀를 데리고 재혼할 경우에도 자녀의 성을 재혼한 남편의 것으로 바꿀 수 없다. 그 밖에도 여성차별적인 조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호주제가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일제가 우리 국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든 제도로 오늘날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호주제를) 개정하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조항을 우선 개정하는 것이 순서다. 여성부가 들어서면 이 문제부터 손댈 것이지만 일상 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법적 문제이므로 완전히 폐지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청와대 여성특별위원회 정책담당관실 관계자의 조심스러운 설명이다. 이에 비해 지난해 격렬한 논쟁 속에 폐지 여부가 보류됐던 군 가산점제는 올해 폐지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국무회의 의결을 거친 관련 법안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데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국회를 통과할 것이라는 게 여성특별위원회 관계자의 전망이다.

▼군 가산점제 폐지된다▼

군 가산점제는 공무원 채용시험시 군필자에게 총점의 5%를 보태주는 제도로 그동안 여성계의 반발을 사왔다. 군 가산점제 폐지의 대안은 두 가지. 첫째, 공무원 시험에서 응시제한연령을 군입대 기간만큼 늘려주는 방안. 둘째는 임금과 호봉 계산시 군복무기간을 근무경력으로 인정해 산입하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많은 기업체에서 시행하는 제도다. 다만 그 동안 기업 자율에 맡겼던 것을 앞으론 법적 의무로 만들어 강제 시행한다는 것이다.

1월4일 오후 7시. 서울 청담동에 있는 여성 인터넷 사이트 ‘여자와닷컴(www. yeozawa.com)’ 사무실을 방문했다. 컨텐츠 3팀장인 박미라씨(37)는 “영 페미니스트 운동에 대한 백래시(backlash: 반격)가 시작됐다”고 입을 열었다.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면 젊은 남자나 늙은 남자 할 것 없이 페미니스트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다.”

‘여자와닷컴’은 여성들에게 양질의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여성운동을 대중화한다는 목표로 출발했다. 호주제 폐지와 같은 여성계의 이슈를 알리는 것 외에 사랑과 성, 재테크, 건강 미용, 패션, 인테리어 등에 대한 최신 정보를 사이트에 날마다 올린다. 여성신문 기자를 거쳐 ‘if’ 편집장을 역임한 박씨는 “여성지 독자층은 한정돼 있지만 ‘여자와닷컴’의 독자층은 무한하다”며 “인터넷을 통해 여성운동의 질적 변화를 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현재 ‘여자와닷컴’ 회원 수는 30만 명에 이른다.

박씨는 영 페미니스트 운동의 기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예전의 여성운동엔 내가 희생해 사회개혁을 이룬다는, 학생운동 방식의 개념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뀌었다. 먼저 나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운동하는 개개인이 행복해야 여성운동도 성공할 수 있다. 페미니즘을 접한 이후로 행복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예전엔 드러내지 않던 은밀하고 사적인 문제를 이슈화한다. 페미니즘 진영 내부에서 여성의 성욕은 참아야 하는 것으로만 얘기돼 왔다. 그렇지만 우리도 성적 욕구가 있고 가꾸고 싶어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은가.”

박씨는 영 페미니스트답게 여성운동의 주요 이슈에 대해 진보적 견해를 나타냈다. 일부일처제에 대해선 “전적으로 여성에 불리한 제도”라고 말했다. 여성계에서 오랫동안 반대해온 간통죄 폐지에 대해선 “성인 남녀의 사랑이나 성을 법으로 통제할 수 있느냐”며 다른 목소리를 냈다. 군 가산점제에 대해선 “육아에 대한 부담만 덜어준다면 여자도 군대 갈 수 있다”고 되받았다.

▼페미니스트도 성욕 있다▼

포르노에 대한 생각도 기자의 선입관을 벗어난 것이었다. 박씨는 “무조건 억압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포르노에 대해 여성을 상품화하고 성을 왜곡시킨다는 비판이 있지 않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여자들이 포르노를 보면 안 된다는 것은 결국 여성을 미성숙한 존재로 본다는 얘기밖에 더 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일부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여성용 포르노 영화의 가치를 인정한다. 포르노가 오히려 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며 포르노 ‘부분 긍정론’을 펼쳤다. 포르노에 흔히 등장하는 변태 성행위가 끼치는 영향에 대해선 “어떤 행태의 성행위든 남녀가 합의하고 상대방에 피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면 변태로 볼 수 없다”고 일축했다.

박씨는 페미니즘 운동의 전망을 밝게 내다봤다.

“예전엔 남자들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여자들이 변하면 남자들이 바뀐다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5년 전만 해도 명절 때 친정에 가느냐 시댁에 가느냐를 두고 다툴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요즘은 명절 때 남녀가 같이 일하자든가, 제사를 지내지 말자든가 하는 얘기들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페니미즘 운동은 결국 삶의 습관을 바꾸자는 것이다. 신세대 여성 중엔 전업주부가 좋다는 사람도 많다. 평화의 열쇠는 여자들이 쥐고 있는 것이다.”

1월5일 오후 2시. 홍익대 앞 카페에서 최창희씨(39)를 만났다. 여성신문 기자 출신인 최씨는 1996년 신낙균 현 민주당 최고위원을 따라 국회에 들어갔다. 당시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이었던 신위원은 국회여성특별위원장과 문화관광부장관을 지냈다. 최씨는 보좌관으로서 여성정책과 관련한 일을 하다가 신위원이 장관직에서 물러난 1999년 9월 국회에서 나왔다.

현재 최씨는 ‘에코 페미니스트 유니온’이라는 자유기고가 모임의 회원으로 방송 출연, 기고 및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에코 페미니즘은 생태주의 또는 환경주의 관점의 여성운동이론으로 여성해방과 자연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다.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억압과 자연 파괴의 원인을 가부장제 또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중요한 개념인 가부장적 자본주의에서 찾는다.

에코 페미니즘 시각에서는 자연과 여성은 둘 다 남성에게 착취당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남성=문화/ 여성=자연의 등식이 에코 페미니즘의 기본 시각이다.

따라서 에코 페미니즘에서는 여성성 회복이 중요한 과제다. 모성 감성 직관 등 여성적 본성이 사회적으로 확대되고 힘을 가질 때 여성해방과 환경복원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최씨는 “여성 억압의 역사와 자연 또는 환경 파괴의 역사는 일치한다”고 말했다.

“자식을 지키려는 모성 본능과 자연을 보호하려는 본능은 통한다. 물질보다 정신에 더 가치를 두고 생명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여성의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전엔 여성성이 여성 억압의 원인으로 지적됐으나 지금은 오히려 여성 해방의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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