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준수사항 제정후 첫 명절]공직사회 스산한 추석

  • 입력 1999년 9월 21일 19시 25분


정부 중앙부처 A국장은 며칠전 집으로 배달돼온 갈비선물세트 처리문제로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의례적인 추석 선물이지만 최근의 공직사회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

그러나 백화점직원이 가져온 선물을 다시 돌려보내기도 어려운 처지라 일단 ‘이것만’이라 다짐하며 “앞으로 백화점에서 전화가 걸려오면 아예 보내지 말라고 하라”고 단단히 아내에게 일러뒀다.

예년 같으면 무심코, 그리고 기꺼이 받았을 추석선물 하나를 놓고 전전긍긍하는 것은 A국장만이 아니다. 올 추석엔 공무원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이는 7월 제정된 ‘공직자 10대 준수사항’에 직무와 관련된 선물은 다과를 불문하고 금지하며 직무와 관련이 없는 선물도 5만원을 초과하는 것은 금지한다고 규정한 때문. 최근 감사원 총리실 등이 대대적인 추석명절 공직기강 감찰을 실시하고 있는 점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일부 사정기관에서 백화점 선물배달 목록을 입수해 감찰활동을 하고 있다는 설마저 나돌고 있다. 감사원 등은 “경기위축 우려가 있는데 그런 식의 암행감찰은 하지 않는다”고 해명했지만 10대 준수사항 제정 후 첫 명절인지라 이같은 ‘관가괴담(官街怪談)’은 계속 확산되고 있다. 공직자라면 누구나 ‘재수없이 걸리기라도 하면…’하고 가슴을 쓸어내릴 ‘스산한 계절’인 셈이다.

그러나 일부 고위공직자에겐 10대 준수사항은 ‘약효가 떨어진 엄포’로만 들리는 듯하다.

이른바 ‘힘있는’ 중앙부처의 B국장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추석선물 목록은 이렇다. “집에 갈비세트 등 10여명이 선물을 보내왔고 양복 티켓이 2개, 10만원짜리 상품권 5개, 그리고 약간의 현금이 들어왔다.”

그러면서 B국장은 “모두 개인적 친분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것이고 직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10대 준수사항이야 알지만 내 경우와는 다르다”고 말했다.

한편 공무원 ‘프리미엄’도 이번 추석에는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가장 큰 프리미엄 상실은 귀향 열차표. 철도청이 민원을 일절 받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항공권 예약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기 때문.

28일 퇴임을 앞둔 한승헌(韓勝憲) 감사원장도 열차표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고향(전북 진안)에 내려가지 않기로 했다. 감사원 관계자는 “굳이 구하려면 구할 수도 있겠지만 공직사정의 최고자리에 있는 만큼 ‘원칙’을 준수하겠다는 상징적 의사표시가 아니겠느냐”고 설명했다.

〈이철희기자〉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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