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명 ‘태백산’ 韓-소 회담… 소련 정보기관 반대에도 성사시켜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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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고르바초프 1931~2022
한국-소련 수교 이끈 고르바초프
김일성 “사절단 철수” 압박에도… “깜짝 놀랄 일 생길 것” 韓 손잡아
한중수교 등 화해무드 확장 역할

노태우 만난 고르바초프 1990년 12월 한국 정상 최초로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을 방문한 노태우 당시 대통령(왼쪽)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같은 해 9월 한국과 소련은 수교했다. 동아일보DB
노태우 만난 고르바초프 1990년 12월 한국 정상 최초로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을 방문한 노태우 당시 대통령(왼쪽)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같은 해 9월 한국과 소련은 수교했다. 동아일보DB
“세상이 깜짝 놀랄 일이 6월 초에 생길 것이다.”

1990년 4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비서실장의 심복이자 소련 문학평론지 ‘리테라투르나야가제타’ 도쿄 특파원 두나이예프가 다가와 귀띔했다. 공로명 당시 주모스크바 영사처장의 심장은 쿵쾅거렸다. 수교도 맺지 않은 소련과의 정상회담. 몇 차례 노태우 대통령이 정상회담 제의 친서를 보냈지만 철옹성처럼 묵묵부답이던 고르바초프 측에서 반응이 온 것이다. 이 러시아발 ‘빅뉴스’를 서울에서 전보로 받은 최호중 외교부 장관은 즉시 김종휘 외교안보수석에게, 김 수석은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북한과 우호 관계였던 소련이 주모스크바 한국대사관 대신 영사처만 개설한 지 넉 달째 되던 때였다. 당시 주모스크바 영사처 창설 요원으로 부임한 백주현 법무법인 세종 고문(전 카자흐스탄 대사)은 31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창설 요원들은 처음부터 ‘연내 수교를 이뤄내라’는 특명을 받고 왔다”며 긴박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북방 정책’을 추진 중이던 노 대통령은 김 수석의 보고를 받은 즉시 긴급 청와대 수석회의를 소집해 수교 대비 작업을 지시했다. 북한 김일성 주석이 소련에 “한국과 수교하면 사절단을 철수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던 때라 한국 정부는 ‘태백산’이란 암호명 아래 두 달가량 극비리에 회담을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노 대통령과 고르바초프가 마주 앉아 관계 정상화를 약속했다.

이후 9월 30일 양국 외교장관들은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만나 수교를 합의하는 ‘코뮈니케(공동 성명)’에 서명까지 했다. 이후 12월 고르바초프는 노 대통령과 모스크바에서 정상회담을, 이듬해 4월에는 소련 최고지도자로선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제주도에서 정상회담을 다시 가졌다.

당시 주역들은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한-소 수교가 고르바초프의 결단과 의지가 아니었으면 힘들었을 거라고 입을 모았다. 초대 주모스크바 영사처장에 대사까지 지낸 공 전 외무부 장관은 “한-소 수교는 물론 소련의 민주화, 페레스트로이카(개혁)까지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고르바초프의 리더십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고르바초프를 4차례나 만난 김종휘 전 수석도 “한-소 협력이 한중 수교,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남북총리회담 및 비핵공동선언으로 연결됐다”며 “고르바초프가 당시 미국과 소련 간 한정된 화해 무드를 아시아에 확장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떠올렸다. 수교 당시 노 전 대통령 사회담당 보좌관을 지냈던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는 “소련 정보기관이 수교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반대했지만 고르바초프의 의지가 워낙 강했다”며 “특히 한국이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는 걸 보고 한국이 성장 가능성이 높은 나라라며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크게 놀랐다”고 말했다.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최지선 기자 aurinko@donga.com


#소련#고르바초프#수교#정상회담#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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