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냉전 끝낸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고르바초프 별세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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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고르바초프 1931~2022
개혁-개방 주도, 노벨평화상 수상
韓-소 수교 견인… 한국과도 인연
尹 “자유-평화의 유산 기억” 조전

첫 방미… 탈냉전 서막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별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왼쪽)이 공산당 서기장 
시절인 1987년 12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을 처음 방문해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두 정상은 이 
정상회담을 통해 사거리 500∼5500km의 중·단거리 핵미사일 보유를 금지한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체결했다. 탈냉전의 
신호탄이 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19년 중국이 이 조약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퇴를 
선언했다. 워싱턴=AP 뉴시스
첫 방미… 탈냉전 서막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별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왼쪽)이 공산당 서기장 시절인 1987년 12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을 처음 방문해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두 정상은 이 정상회담을 통해 사거리 500∼5500km의 중·단거리 핵미사일 보유를 금지한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체결했다. 탈냉전의 신호탄이 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19년 중국이 이 조약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퇴를 선언했다. 워싱턴=AP 뉴시스
반세기 가까이 이어진 미소 냉전 종식과 소련 해체 등 현대사 대격변의 주역이었던 옛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별세했다. 향년 91세.

러시아 타스통신에 따르면 이날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심각하고 오래된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스크바 외곽 전원주택에서 여생을 보낸 그의 시신은 1999년 사망한 부인 라이사 여사가 묻힌 모스크바 묘지에 안치될 예정이다.

옛 소련의 낡은 정치·경제 체제에 염증을 느꼈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소련 공산당 정치국 내 최연소(54세)로 1985년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가 추진한 옛 소련의 변화는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뒤 반세기 가까이 드리웠던 ‘철의 장막’을 거두고 동서 냉전의 벽을 허무는 시작이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이전까지 옛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비판했던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1985∼1988년 수차례 회담하며 데탕트(해빙 무드)를 이끌었다. 1989년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몰타 회담에서 역사적인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이는 옛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사회주의 몰락과 동서독 통일로 이어졌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냉전 종식과 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한국과 인연도 깊다. 1990년 미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북방정책에 호응해 전격적으로 한-소 수교에 합의했다. 집권세력 내부의 반대와 북한의 반발에도 경제난을 타개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린 결단이었다. 그는 수교 10주년인 2000년 본보 인터뷰에서 “국제관계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우리의 새로운 사고와 새 대외정책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1990년 옛 소련의 초대 대통령에 올랐지만 1991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로 권력 기반을 잃었다. 그해 12월 소련은 해체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고인의 딸인 이리나 비르간스카야 고르바초프 재단 부회장에게 조전을 보내 “고인의 결단과 지도력, 자유와 평화의 유산을 오래 기억하고 지켜낼 것”이라고 밝혔다.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생각하나”… 철의 장막 걷고 냉전 종식 선언


고르바초프가 걸어온 길
54세에 최연소 소련 서기장 올라… 동유럽 공산권 민주화 물꼬 트고
베를린 장벽 붕괴-독일 통일 기여… 푸틴 향해 “우크라 전쟁 멈춰라”
서방선 ‘고르비’ 애칭 불렸지만, 러선 “소련 해체 장본인” 비판도


고르바초프, 조지 부시와 ‘백악관 회동’ 1990년 6월 독일 통일 관련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 백악관을 
방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왼쪽)과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악수하고 있다. 6개월 전인 1989년 12월 두
 정상은 지중해 휴양지 몰타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워싱턴=AP 뉴시스
고르바초프, 조지 부시와 ‘백악관 회동’ 1990년 6월 독일 통일 관련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 백악관을 방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왼쪽)과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악수하고 있다. 6개월 전인 1989년 12월 두 정상은 지중해 휴양지 몰타에서 정상회담을 열고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워싱턴=AP 뉴시스
“아직도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생각하세요?”

1988년 5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옛 소련의 모스크바 붉은 광장을 산책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이렇게 물었다. 이전에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규정했었다.

“아뇨. 다른 시간, 다른 시대의 얘기죠.” 레이건은 이렇게 답했다. 1985년 첫 회담부터 수차례 고르바초프를 만난 뒤 이제는 미소 냉전 시대가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강조한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다음 해인 1989년 지중해 몰타 해역 선상에서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했다.

“세계는 한 시대를 떠나 다른 시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미국에 맞서 격렬한 전쟁을 결코 하지 않겠다고 미국 대통령에게 확실히 말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가까이 드리웠던 ‘철의 장막’을 걷어내고 탈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 레이건 “고르바초프와 케미가 맞아”

고르바초프는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198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군축 협상을 위해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처음 만났다. 두 정상이 만나 7초간 나눈 악수는 해빙의 신호탄이었다.

영국 가디언에 따르면 레이건은 고르바초프를 만난 뒤 참모들에게 “새로운 스타일의 소련 지도자”라며 높이 평가했다. “우리 사이에 ‘케미’가 맞는다(There’s a chemistry between the two of us)”며 “우리는 서로 경청했다. 동의하지 않았지만 공통점을 찾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후 회담은 쉽지 않았다. 1986년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연 군축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났다. 두 사람의 신경전도 이어졌다. 레이건이 “미국에서는 백악관 앞에서 나를 아무리 비난해도 잡혀가지 않는다”고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자 고르바초프가 “붉은 광장에서도 당신을 욕해도 아무도 잡아가지 않는다”고 응수한 일도 알려져 있다.

1987년 고르바초프는 처음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레이건과 3차 정상회담을 한다. 이때부터 두 사람이 주고받는 농담이 늘었고 분위기도 좋아졌다. 이는 미국과 소련이 사거리 500∼5500km의 중·단거리 핵미사일 생산·실험·배치를 전면 금지하는 중거리핵전력조약(INF) 체결로 이어졌다. 냉전 종식으로 가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1989년 동유럽 공산권 국가에 민주화 시위가 번질 때 이 국가들에 대한 무력 개입을 정당화했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해 동유럽에 자유의 물꼬를 텄다. 같은 해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를 사실상 용인했다. 이듬해 동서독 통일 협상 과정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이런 기여를 인정해 서방 언론은 그를 ‘고르비’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 서방에선 ‘고르비’ 애칭, 고국에선 비판 여론
동독 호네커 서기장과 ‘형제의 키스’ 1987년 5월 동독을 방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왼쪽)이
 에리히 호네커 당시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 베를린 쇠네펠트 공항에서 입맞춤을 하고 있다. 러시아 출신 화가 드미트리 브루벨은 
베를린 장벽 붕괴 다음 해인 1990년 장벽에 이 장면을 풍자한 벽화 ‘형제의 키스’를 그렸다. 베를린=AP 뉴시스
동독 호네커 서기장과 ‘형제의 키스’ 1987년 5월 동독을 방문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왼쪽)이 에리히 호네커 당시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 베를린 쇠네펠트 공항에서 입맞춤을 하고 있다. 러시아 출신 화가 드미트리 브루벨은 베를린 장벽 붕괴 다음 해인 1990년 장벽에 이 장면을 풍자한 벽화 ‘형제의 키스’를 그렸다. 베를린=AP 뉴시스
고르바초프는 1931년 3월 2일 옛 소련 북부 스타브로폴 지방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산당에 들어간 그는 1985년 3월 역대 최연소(54세) 서기장에 오르며 권력의 정점에 섰다. 젊은 정치인 고르바초프는 미국에 비견할 강국이던 소련이 쇠락한 이유를 낡은 리더십에서 찾고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그는 올해 4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겨냥해 “세상에 인명보다 소중한 건 없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을 중단하라고 비판했다. 다만 러시아에서는 그를 소련 해체의 장본인이라고 비판하는 여론이 적지 않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이지윤 기자 asa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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