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도 R&D로는 필패… 일반인 참여 I&D 꽃 피워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1일 03시 00분


전문가 13인이 말하는 창조경제의 길

《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를 국정과제의 첫 머리에 올렸다. 지난달 25일 취임사에서도 박 대통령은 “경제부흥을 이루기 위해 창조경제와 경제민주화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주무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는 물론 경제연구소도 바빠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창조경제는 그 개념조차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따라 동아일보 산업부는 전문가 13명을 심층 인터뷰해 창조경제의 개념과 실천 전략을 물었다. 이들은 “연구개발(R&D)을 넘어 상상개발(I&D)을 해야 한다”, “신성장동력에만 매달리지 말고 현(現) 성장동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등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지금까지처럼 정부가 주도해서는 창조경제가 실패한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다. 》

‘창조경제의 내용물을 어떻게 채워야 하나.’ 대한민국의 ‘브레인’들이 고민에 빠졌다. 아직은 구호 수준에 그치는 창조경제의 세부 정책과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김종훈 미래부 장관 후보자는 28일 교육과학기술부, 방송통신위원회 인력을 중심으로 청문회 준비팀 내에 창조경제 태스크포스팀(TFT)을 만들어 구체적 전략 마련에 들어갔다. LG경제연구원, 포스코경영연구소 등 민간 연구소와 정부 산하 연구기관도 새 패러다임에 맞춘 연구에 돌입했다.

하지만 도대체 창조경제가 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지금까지 창조 없는 경제 발전이 있었느냐”, “힘내서 경제를 살려보자는 선전 문구 아니냐”고 폄하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동아일보가 인터뷰한 전문가들은 ‘과학기술, 정보통신기술(ICT) 등의 융합과 인재 양성을 통한 경제 발전’이라는 창조경제의 큰 방향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자칫하면 과거 첨단기술 위주의 R&D정책을 답습하는 데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 융합, R&D 혁신이 키워드

전문가들은 ICT의 역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창조경제의 정의를 달리 했다. 대선 공약 작성에 관여했던 윤창번 김앤장 고문(전 하나로텔레콤 사장)은 “창조경제에서 ICT는 다른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비타민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반면 김종석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혁신과 창조는 ICT만이 아니라 전통 굴뚝 산업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융합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류한호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조정실장은 “창조경제는 과학과 인문의 결합으로 새로운 콘셉트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지훈 명지병원 IT융합연구소장은 “과학기술 기반의 혁신을 바탕으로 한 산업구조 재편”이라고 정의했다.

기존의 R&D정책을 창조경제의 개혁 1순위로 꼽는 데도 이견이 없었다. 정부가 주도하는 예산 나눠주기 식의 R&D정책이나 단순한 연구실적 쌓기로는 창조경제를 하기 힘들다는 얘기다. 실제로 한국은 특허 출원건수는 세계 4위지만 제품 생산이나 기술이전과 무관한 휴면(休眠) 특허가 2011년 기준으로 70%를 넘는 상황이다.

정구현 자유경제원 이사장은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가 미국 일본과 맞먹는 수준인 데도 큰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은 ‘연구를 위한 연구’를 하기 때문”이라며 “지금 같은 R&D정책으로는 창조경제는 요원하다”고 지적했다.

○ 첨단 강박증 버리고 사람 남겨야

창조경제를 성공으로 이끌려면 첨단기술 강박증을 버리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조언이 많았다. 정보기술(IT), 생명공학기술(BT), 나노기술(NT), 문화기술(CT), 환경기술(ET), 우주항공기술(ST) 등 ‘6T’를 나열하는 식의 정책을 되풀이하는 것은 창조경제의 해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승철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은 “창조가 꼭 첨단기술에서 나와야 할 필요는 없다”며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이 기존에 없던 새로운 기술로 탄생한 것이 아니듯 발상의 전환만으로도 새로운 산업의 씨앗을 뿌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신성장동력이 아닌 현성장동력 산업에서 열쇠를 찾자”며 “항공기 정비, 자전거 승마 등 레저, 복합리조트 등 새로운 일자리를 양산할 씨앗을 뿌려야 한다”고 제안했다.

윤종록 연세대 미래융합기술연구소 교수(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전문위원)는 R&D가 아닌 I&D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1% 과학자의 전유물인 R&D뿐 아니라 99%의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는 I&D를 대중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며 “상상력의 씨앗을 디지털 토양에서 자유롭게 틔울 수 있는 개방적 수평적 창업문화를 만드는 것이 창조경제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듯 창조경제의 성과를 측정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창조의 결과물(creation)이 아닌 창조성(creativity) 자체가 목표가 돼야 한다”며 “일자리 역시 단순히 채용인원을 늘리는 것이 아닌, 좋은 직업의 개수를 늘리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동욱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원장은 “R&D 성과물이 아닌 인재를 남기는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도 “창조경제 패러다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적인 사람’”이라며 “기계로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의 가치를 발굴하는 것이 창조경제의 목표”라고 말했다.

○ 정부 역할 줄여야

일각에서는 이명박 정부의 성장담론인 ‘녹색성장’도 기대만큼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처럼 창조경제가 성공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시선을 보낸다. 이 전 대통령이 2008년 녹색성장 정책을 발표하자 정부가 비슷비슷한 정책과 사업을 쏟아내고, 민간기업까지 압박하던 당시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창조경제가 실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공통적으로 정부의 지나친 개입을 자제해야 한다고 답했다. 방석호 홍익대 법학과 교수는 “창조경제에서는 정부도 하나의 플레이어에 불과하다”며 “정부가 정보를 독점하려 하지 말고 모두와 공유해 민간과 개인의 창의력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지훈 소장은 “정부가 큰 그림과 작은 그림을 모두 그리며 이끄는 방식은 힘이 많이 빠졌다”며 “아이디어와 창의성이 시장에서 잘 받아들여지고 이를 사회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룰을 정한 뒤 지켜보는 심판과 같은 역할을 해야 실패를 피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용석·장강명·정지영 기자 nex@donga.com
#창조경제#박근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