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대신 삽을 든 북한의 대학생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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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신입생도 안뽑고 재학생은 노력동원 내몰고…

김일성大 출신 본보 주성하 기자 대학 재학시절 강제동원 체험기

《 북한 대학생 10만여 명이 수업을 중단하고 10개월 가까이 평양 10만 채의 살림집 건설에 동원되고 있다는 소식이 미국의 자유아시아방송(RFA)을 통해 전해져 화제가 되고 있다. 한국이나 서방세계의 시각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사실 북한 사람들에겐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북에선 비효율적 동원이 지극히 정상적인 일상이 된 지 벌써 수십 년째다. 》

▶본보 5일자 2면 北 대학, 올해 신입생 안뽑아…
1990년대 평양에서 김일성대를 다녔던 기자 역시 그랬고 선후배들도 마찬가지다. 요즘 대학생들이 아파트 건설에 총동원됐다는 소식을 접하니 대학시절 체험했던 숱한 동원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평양의 한 강하천 정비에 동원됐던 때가 떠오른다. 학년별로 석 달씩 교대로 수업을 중단하고 동원됐는데 우리 학년 100여 명은 겨울에 차출됐다. 담당 구간은 지하철에서 내려서도 한 시간 넘게 걸어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우리가 가진 작업도구는 집에서 갖고 나온 정 해머 삽 곡괭이 따위가 전부였다.

허허벌판에서 한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하루 종일 일할 수는 없기 때문에 가장 먼저 휴식공간으로 쓸 움막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꽁꽁 언 땅에 정을 박고 교대로 해머를 휘둘러봐야 겨우 밤톨만 한 흙이 떨어져 나왔다. 갖은 고생 끝에 열흘 만에 겨우 기둥을 몇 개 세우고 수십 명이 빼곡히 들어가 앉을 수 있는 움막을 만들었다.

이어 강바닥에서 흙을 파내기 시작했는데, 흙 한 담가(들것)를 담는 데 네댓 명이 달라붙어 한나절씩 걸렸다. 학생간부라서 안 하고, 여자라서 봐주고 하다 보니 실제 일하는 사람은 반밖에 되지 않았다. 작업인원들도 열심히 일할 리 만무했다. 석 달 동안 일했지만 겨우 강에 가로세로가 5m가량 되고 깊이가 사람 키만 한 웅덩이를 하나 파놓았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장관급인 노동당 중앙위 교육비서가 벤츠를 타고 직접 격려하러 오기도 했다.

철수 기한이 점점 다가오자 작업장 책임자로 나와 있던 교수의 얼굴엔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이유야 어떻든 당이 할당한 작업량에 턱없이 미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 대학 입학한 첫날부터 잔디밭 잡초 뽑아… ▼
평양 남포 고속道 공사땐 몇달동안 등짐

교수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더니 어느 날 환한 얼굴로 돌아왔다. 작업장에서 몇 km 떨어진 곳에서 공사를 하고 있던 인민무력부 공병국(건설전담부대)에서 굴착기 1대를 반나절 빌려 쓰기로 교섭했다는 것. 중장비가 매우 귀한 북한에선 성사되기 힘든 교섭이다. 조건은 디젤유 100L와 굴착기 ‘바가지(버킷)’에 담배와 술을 가득 채워야 한다는 것. 그것도 외제 담배여야 하며 술도 밀주가 아닌 공장술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달렸다. 교수는 학생들을 불러 모아 비용을 분담시켰다. 그나마 김일성대여서 잘사는 학생이 많아 집에서 돈을 가져왔다.

철수하기 3일 전쯤에 드디어 군관 1명과 병사 1명이 굴착기를 몰고 나타났다. 그날 우리는 제방에 앉아 굴착기의 작업모습을 지켜보았다. 불과 다섯 시간 만에 우리가 석 달 동안 파놓은 웅덩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큰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바가지에 술과 담배 막대기를 가득 채우고 돌아가는 굴착기를 보면서 우리 모두는 극심한 허탈감을 느꼈다. 북한 최고 엘리트라고 하는 김일성대 학생 100여 명이 3개월 동안 한 일이 굴착기 반나절 작업량보다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대학 시절 수많은 노력동원과 행사에 나가야 했다. 북한 대학생들은 매년 봄가을 합쳐서 약 두 달간 농촌동원을 나간다. 이때는 농민의 지시 아래 농작물을 손으로 심고 베고 해야 한다. 농촌동원은 농촌 학교인 경우 남한의 소학교 5학년에 해당하는 중학교 1학년경부터, 도시 학교는 중학교 4학년부터 나가는데 늙어서 직장을 은퇴할 때까지 매년 나가야 하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에겐 습관화된 일이다.

북에선 대학생들의 노력동원을 시간낭비 인력낭비로 보지 않는다. 대학생들을 혁명가로 키우기 위한 필수 코스쯤으로 간주한다. 기자가 김일성대에 입학한 첫 3일간은 대학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아야 했다.

평양시내 통일거리 아파트 공사장에 나가 폐기물을 삽으로 차에 담았던 일도 기억이 난다. 수백 명이 동원됐지만 사실 그때도 굴착기 한두 대면 충분할 일이었다. 삽질하는 것보다는 공사장까지 왕복 4시간 가까이 걸어 다니는 일이 더 힘들었다. 우리가 일했던 곳은 완공 직전의 고층아파트가 붕괴해 군인 1개 대대가 몰살당한 현장 옆이었다.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해 수백 명이 인해전술로 달라붙어 시멘트가 미처 굳기도 전에 층고를 올리다 붕괴되는 바람에 전원 몰살당했다. 당시 평양에 살던 사람들은 누구나 이 일을 알고 있다. 몇 년 뒤 후배들은 평양 남포 고속도로 건설장에 나가 흙 마대를 몇 달 동안 등짐으로 날랐다.

공사뿐 아니라 명절 때마다 각종 행사에 동원되는 일도 고역이었다. 일반적인 광장 행사는 훈련하는 데만 석 달 넘게 걸리며 열병식에 차출되면 반년 넘게 수업을 빠졌다. 받지 못한 반년 치 수업은 열병식이 끝난 뒤 방학하기 전에 열흘 정도 속성으로 가르친다. 말이 속성이지 그냥 교수들이 알아서 점수를 잘 준다.

최근 탈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요즘은 각종 노력동원의 고된 작업은 가난한 학생들 몫이다. 잘사는 학생들은 후방공급 또는 병가를 구실로 그 기간에 집에서 논다. 그 대신 돈을 내면 된다. 그 돈으로 가난한 학생들의 식량이나 부식물 또는 공사 자재를 대는 것이다. 돈 있는 집 자식은 놀아서 좋고 가난한 집 자식은 일을 하는 대신에 배를 곯지 않아 좋다. 현재 진행되는 평양 10만 채 건설장에서도 간부 집 자식들은 각종 핑계로 다 빠지고 가난한 학생들만 남아 대충 삽질하는 척 흉내만 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을 것이다. 수백 명이 달라붙어봐야 굴착기 한 대 작업량에도 못 미치는 그런 종류의 일들이지만 중장비, 연료, 부속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없는 북한에선 그나마 인력이 가장 싸고 유일한 해결책이다. 인력마저 동원하지 않았다면 당의 방침을 집행하려는 태도가 부족하다고 여러 고위급 간부의 목이 날아갈 일이다.

만일 누군가가 북한에 가서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두뇌들을 어떻게 이런 단순노동에 허무하게 허비할 수 있느냐”고 대학생들에게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아마 “우리가 대학에서 배우는 것 중에 아까운 지식이 몇 %나 될까요”라든지 “배운 지식을 활용할 만한 곳을 공화국에서 제발 좀 찾아주세요”라며 씁쓸하게 대답하지 않을까.

어찌됐든 때가 되면 대학졸업증은 나온다. 동년배의 약 15%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어차피 북에선 어떤 대학을 나왔는지가 고려될 뿐 실력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가장 선호되는 권력기관에 들어가기 위해선 출신성분과 부모의 직위, 재산, 대학 간판이 결정적인 요소이다. 실력이나 학점은 좋은 직장에 들어갈 때에도, 들어가서도 쓸모가 없다. 건설장에 동원된 북한 대학생들의 유일한 위안은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가는 대학시계’일 뿐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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