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代 세습 ‘金의 왕국’]<上> 족벌독재 고수 北체제 앞날은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9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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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보다 혈통” 특권 야합… 신-구 엘리트 권력투쟁 불가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3남 김정은을 ‘인민군 대장’으로 정치무대에 등장시켰다. 27세에 불과한 그를 후계자로 내세운 것은 그만큼 시간에 쫓긴 다급함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2008년 8월 뇌혈관계 질환으로 치료를 받은 뒤 각종 후유증에 시달리는 김정일 자신은 물론이고 그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측근들로서는 ‘빠른 세습’을 통해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모두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한 셈이다. 그러나 낡은 독재체제 유지를 위한 시대착오적인 3대 세습은 구조적인 모순과 불안정 요인을 내포하고 있어 앞길이 밝지 않다.

○ 수령 절대주의 체제의 세습 공식화

북한의 3대 세습은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분단 65년 동안 한반도 북쪽에 구축한 ‘수령 절대주의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다분히 예견된 조치였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수령으로 신격화된 김씨 부자에게 정치 경제적 권력이 집중된 이 체제는 1970년대 이후 북한의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성장과 발전을 막은 퇴행적 메커니즘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이 체제는 쓰러져가는 국가를 지탱하는 바탕이 됐다.

이번 3대 세습 공식화는 김정일과 그 측근들이 김정은을 다음 수령으로 내세우고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야합의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세습 프로세스가 작동하는 이유는 김정일 집권 이후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최소한의 민주주의도 말살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를 훼손하고 밀실에서의 측근정치를 통해 중요 정책결정을 내렸다. 주민들은 잘못된 정책에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수령 절대주의체제는 수령 1인과 소수 엘리트만이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인민들은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호받지 못하는 극도의 불평등 구조를 낳았다. 그 결과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 당과 군의 간부들은 쌀밥과 고기로 배를 채웠지만 하급 간부와 주민들은 옥수수도 먹지 못해 굶어 죽었다.

○ 스스로 세운 원칙 무너뜨린 무리수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는 데 급급한 김정일은 스스로 만든 원칙도 무시했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권력을 물려받기 위해 ‘후계자론’을 만들어 ‘인물 본위의 원칙’을 내세웠다. 자신이 수령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김정은은 지금까지 아무런 능력을 공인받지 못한 상태에서 지도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계자가 됐다.

또 김정일은 ‘후계자론’을 통해 새 후계자가 인민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북한의 경제 상황이 지금보다 나았던 1974년 당내에서 후계자로 공인된 김정일은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다양한 정치 경제적 업적을 내놓아 나름대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김정은은 인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아무런 업적이 없다. 이 때문에 3대 세습 과정에서는 ‘만경대 혈통’과 ‘백두 혈통’을 강조하는 혈통승계론이 전면에 등장했다.

북한의 3대 세습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권력 승계의 원칙도 무시했다. 레슬리 홈스 박사의 ‘3Ps+X’ 이론에 따르면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3P, 즉 권력 기반(power base), 개인적 자격(personal qualification), 정책입안 능력(policy making ability)을 겸비한 후보자들이 전임 지도자의 사망 등 특별한 상황(X)에서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 소련과 중국 등의 경험이다. 현재 김정은은 어떤 자격도 증명하지 못했다.

○ 후계체제의 불안정성 주시해야

3대 세습의 공식화는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을 위한 중간단계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김정은의 대장 승진은 준비 단계의 마무리”라며 “김정은이 2012년까지 후계자로 공식 추대되는 확립 단계와 권력 장악을 마치는 공고화 단계가 성공적으로 끝나야 후계체제가 완성된다”고 말했다. 이승열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소 연구위원도 “후계체제는 김정은이 자신의 조직과 사람, 규율을 만들었을 때 끝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후계체제의 확립 및 공고화 단계가 마무리될 때까지 북한 내부의 불안정성이 가중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김정은으로 권력이 이양되는 과정에 엘리트그룹 내에서 줄서기와 끌어내리기 등 이전투구 양상의 권력투쟁이 발생할 수 있다. 백승주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은 “김정일과 김정은이라는 두 최고지도자 사이의 의견 불일치가 외부에 국가정책 혼란으로 반영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북한의 내부 불안정은 김정일 유고 시 절정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후까지 김정일의 곁을 지킨 ‘문고리 권력’ 등 옛 엘리트그룹과 김정은의 주변에 포진한 신진 엘리트그룹 사이에 구조적인 권력 갈등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 “북한이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신석호 기자·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 김정일 10년 장기숙성 김정은 21개월 단기속성 ▼
2대, 3대 세습 비교

김정일 국방위원장에서 3남 김정은으로의 세습 과정은 과거 김일성 주석에서 김 위원장으로의 세습과 비교할 때도 파격적인 측면이 있다.

우선 속도가 빠르다. 김정일은 22세 때인 1964년 김일성종합대를 졸업한 뒤 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해 10년 뒤, 32세 때인 1974년 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 정치위원(현재의 정치국원)에 선출돼 후계자로 공식 내정됐다. 그는 이어 6년 뒤인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 정치국 상무위원을 맡으면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정은은 2009년 1월 8일 자신의 26세 생일 때 아버지 김정일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1년 9개월 동안의 짧은 내부 우상화 작업 기간을 거쳐 27세의 젊은 나이에 공식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김정은에 대한 공식 후계자 추대는 북한이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로 예고한 2012년까지는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아버지가 공직 시작 후 10년 만에 이룬 일을 3년 만에 해치우는 셈이다.

형식도 파격적이다. 북한 매체들은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석상에 등장한 1980년에야 비로소 ‘위대한 김정일 동지’라며 실명을 사용해 보도했다. 북한 매체들은 28일을 기해 김정은의 실명을 대내외에 보도했다. 아버지가 당 조직지도원이라는 하위직에서 공직을 시작한 반면 김정은은 일약 인민군 대장으로 공직을 시작하는 점도 차이가 난다. 김정은은 당 대표자회에서 요직을 맡을 가능성이 높아 파격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공식 정치 무대에 등장한 이후의 과정도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일은 후계자로 공식 내정된 이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1994년까지 아버지의 든든한 후견을 받으며 당을 중심으로 자신의 후계체제를 구축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1974년부터 1985년까지는 김일성-김정일 공동정권이었고 1985년부터 1994년까지는 김정일-김일성 공동정권이었다”고 후일 평가했다.

올해로 68세를 맞은 김정일의 건강이 날로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김정은은 김정일의 보호를 얼마 받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홍관희 안보전략연구소장은 “김 위원장의 건강이 일시적으로 회복된 듯 보이지만 지병이 심해 길게 봐도 5년 안에 유고 상태가 올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아버지가 살아있는 짧은 기간에 확고한 자기권력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무리수를 둘 경우 예상할 수 없는 부작용이 초래될 가능성이 크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3대 세습 세계에 유례가 없다 ▼
1945년 이후 23회 세습 시도… 성공한 경우는 9차례뿐


북한이 시도하고 있는 3대 세습은 과거 왕정시대에는 흔한 일이었지만 현대 공화정시대에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박형중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독재국가에서 정권을 세습하는 사례도 있지만 북한과 같이 3대에 걸쳐 세습이 이뤄진 경우는 유례가 없다”고 강조했다.

박 위원은 미국의 정치학자 제이슨 브라운리가 1945년부터 2006년까지 3년 이상 집권한 258개 독재국가에서 권력세습 사례를 조사한 결과 모두 23차례 권력세습이 시도됐고 성공한 경우는 9차례였다.

2005년 토고에서 38년간 집권하며 아프리카 최장기 독재자 기록을 세웠던 에야데마 냐싱베가 심장마비로 급사하자 아들 포르 냐싱베가 군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대통령직 승계를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카스피 해 연안의 아제르바이잔에서는 2003년 게이다르 알리예프 대통령의 아들인 일함 알리예프가 부정, 불법선거 논란 속에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시리아에서는 무혈 쿠데타를 거쳐 1971년 집권해 30년 동안 철권통치한 하페즈 알아사드가 2000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차남 바샤르 알아사드가 35세의 나이에 대통령직에 올랐다.

이 밖에 2004년 싱가포르에서 리콴유 총리가 아들 리셴룽에게, 1975년 대만의 장제스 총통이 장징궈에게, 1971년 아이티에서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아들 장클로드에게 정권을 물려줬고, 1961년엔 도미니카공화국에서, 1956년엔 니카라과에서 각각 권력 세습이 이뤄졌다.

박 위원은 “부자 세습은 안정적으로 권력을 승계하려는 독재자와 안정적으로 기득권을 보호받으려는 권력 엘리트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이뤄진다”며 “북한이 3대 세습에 성공한다고 해서 직면한 대내외적 난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높아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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