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 스스로 깬 국정원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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檢이 엠바고 요청한 ‘탈북자 납치 간첩’ 사건
일부 언론사에 전화 걸어 “보도해달라” 요구
‘정국 전환용’ 의혹 일자 “그런 전화 안해” 부인

9일 오후 5시경 오세인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출입기자단에 엠바고(보도유예) 요청을 했다. 사안은 국가정보원이 중국에서 탈북자를 납치해 강제 북송한 혐의로 한국 국적의 김모 씨(55)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는 것. 오 차장은 “북한 당국이 연루됐을 가능성이 있고 김 씨의 체포사실이 알려지면 중요 참고인들이 잠적할 우려가 높다”며 5월 중순 수사결과 발표 때까지 보도를 미뤄줄 것을 공식 요청했다.

검찰은 국정원과 협의를 거쳐 엠바고 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 국정원이 수사하는 사안은 직접적인 대언론 창구가 없어 사건 수사를 지휘하는 검찰에서 언론에 협조를 구하고 있다. 기자단은 “사안의 성격상 보도유예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이를 받아들였다. 엠바고는 중요 정부 정책이나 수사의 성격상 한시적으로 보안 유지가 필요할 때 정부나 수사당국이 언론에 미리 주요 내용을 알려주고 보도유예를 요청하면 국익을 고려해 언론사가 이를 받아들이는 신사협정이다.

그러나 이틀 뒤인 11일 오후 국정원 직원들이 여러 언론사의 간부 또는 일선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의 지휘를 받아 수사하고 있는 이 사건의 보도를 요청하고 나섰다. 대부분의 언론사는 “엠바고가 걸려 있는 사안인데 무슨 얘기냐”며 기사화가 어렵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국정원 측에서는 “이미 검찰과 이야기가 다 돼 있다” “검찰에 물어보면 다 알려주기로 했다”며 거듭 보도를 요청했다. 대부분의 언론사는 이를 거절했으나 12일 한 조간신문은 이 사건을 보도했다.

국정원은 이 과정에서 검찰 측과는 아무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언론사에 보도를 요청한 것으로 파악됐다. 통상적으로 국정원은 국가안보 및 북한과 관련된 공안(公安)사건에 대해선 언론사가 먼저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취재에 나서도 “국익에 직결되는 사안”이라며 사실 확인을 거부해왔다. 더욱이 이번 사안은 언론에 먼저 보도될 경우 추가 수사가 실패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평소 보안을 생명으로 하는 최고정보기관인 국정원의 이 같은 태도는 석연치 않다는 지적이 나왔다. 검찰도 국정원의 행태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때문에 최근 천안함 침몰사건이나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5만 달러 수수의혹 사건 무죄 선고 이후 현 정부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게 돌아가자 국정원이 국면 전환용으로 이 사건을 활용하려 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또 국정원 직원들이 여러 언론사에 비슷한 전화를 건 것으로 보아 상부지시에 따른 조직적인 행동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국정원 이종태 대변인은 12일 국정원의 공식 입장을 묻는 동아일보의 질문에 “언론사에 그런 전화를 한 사실이 없다”고 발뺌했다.

한편 검찰은 중국 내 국정원 요원들에 대한 정보를 빼내고 탈북자를 강제 북송한 혐의로 김 씨를 구속했다고 12일 밝혔다. 김 씨는 중국에 불법 체류하던 1999년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된 뒤 수차례 북한을 방문해 북한 인민군 보위사령부 고위 간부를 만나 지령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과 국정원은 김 씨가 북한에서 생산된 마약을 중국과 한국에 유통시켰다고 보고 조직책과 유통망을 찾기 위해 수사하고 있다. 북한 당국이 마약을 외화벌이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진술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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