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정책 조직적 반대… 발목잡기 상상 이상”

  • 입력 2008년 3월 13일 03시 07분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1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광화문 문화포럼’ 에서 강연을 마친 후 문화권력에 대한 질문을 받자 “현 정부와 철학이 맞지 않는 문화예술인은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낫다”고 대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1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린 ‘광화문 문화포럼’ 에서 강연을 마친 후 문화권력에 대한 질문을 받자 “현 정부와 철학이 맞지 않는 문화예술인은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낫다”고 대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 여권, 이념 - 코드인사 자진사퇴 요구 왜?

정부와 여당인 한나라당 내에서 정권교체 이후에도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전(前) 정권 인사들에 대한 사퇴를 동시다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여기에는 ‘이념’과 ‘코드’를 앞세워 정부 안팎 곳곳에 포진한 구여권 기반세력의 ‘발목잡기’가 상상했던 이상으로 심각하며, 방치할 경우 ‘일하는 정부’를 위한 액션 플랜(Action Plan)의 실행이 불가능해질 것이라는 범여권 내부의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의 핵심 관계자는 “당과 청와대 장관들이 서로 짜고 한 것이 아니다”면서도 “코드정권에서 정치적으로 임명된 사람들이 물러나야 한다는 것은 상식과 도의에 속한다. 더욱이 새 정부의 정책에 순응은커녕 버티고 가로막고 무산시키려 하고 있다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은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당(黨)·정(政)·청(靑)의 조율 하에 ‘작업’이 추진되는 양상이다.

▽‘이념·코드’ 인사들의 ‘버티기’ 좌시 못할 수준 판단=여권이 파악하고 있는 1차적인 교체대상은 노무현 정권에서 임명됐으면서도 법적 임기 보장을 내세워 사퇴하지 않고 있는 주요 정부직과 공공기관장 등 120명 정도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교체돼야 할 전체 인원은 1000명 안팎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부처의 경우 산하기관 40여 개 가운데 절반 정도가 노무현 정권 막바지인 지난해 12월을 전후해 기관장들이 임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공기업과 정부 산하기관 간부 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는 인사 20∼30명이 1월 초 서울 시내 모처에서 모여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더라도 각자의 잔여 임기를 모두 마무리하자’고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 정부는 이들 임원에 대한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을 강제적으로 퇴출시키기 위해서는 검찰의 내사와 국가정보원의 뒷조사가 가장 효율적이지만 자칫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점도 고민이다.

정부의 다른 관계자는 “현재 공기업과 정부 산하기관의 주요 현안과 간부들의 활동 내용을 직간접적으로 파악해보고 있지만 아직 세밀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며 “임기가 정해진 이들을 강제로 퇴진시킬 방법은 사실상 없다”고 토로했다.

실제 새 정부 들어 단행한 외청장 인선 과정에서 모 인사의 경우 곧 임기가 끝나는데도 잔류 의사를 고수해, 끝내 인사대상에서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법률상 임기가 보장된 이들이 버티는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말’을 통해 여건을 조성함으로써 당사자들이 스스로 사표를 내서 재심을 받게 하는 것”이라며 “강제로 쫓아낼 경우 혹여 나중에 당사자들이 문제 제기를 하며 재판을 걸 경우 대부분 질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실용정부’ 가로막기 따른 총선 위기의식도 작용=여권이 전방위적으로 노무현 정부 인사들의 ‘신변정리’를 압박하고 나선 데는 최근 대운하 건설에 대한 조직적 반대 운동,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에 대한 거센 반발 등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의 핵심 사업에 대한 여론수렴 작업도 진행되기 전에 무산을 전제로 한 조직적 움직임이 있고, 방송 통신 융합에 저항하는 방송계 일각의 이해와 구여권 코드 이념 세력들의 이해가 총선을 계기로 단일한 ‘반여 전선’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권의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대선을 통해 대통령은 바뀌었지만, 정권은 교체되지 않았다. 국회는 물론이고 정부가 국정을 펴나가는 주요 길목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박아놓은 ‘대못’들이 곳곳에서 새 정부의 국정운영 방향을 가로막고 있다”면서 “특히 ‘문화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의 기득권 지키기 시도는 뿌리가 매우 깊다”고 강조했다.

여권은 특히 대선 직후 531만 표의 압도적 표차에 숨죽였던 정부 안팎의 ‘구여권 기반 세력’들이 각료 인선 파동을 계기로 일제히 결집하며 총선에서 다시 현 정부를 ‘구태 부패 세력’으로 몰려는 통합민주당과 연계할 소지를 조기에 차단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10년간 무능 좌파 정권의 실정을 숨기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총공세가 시작된 만큼 좌시할 경우 총선도 위험하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박성원 기자 swpark@donga.com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한나라 “국정실패 책임져야” 민주 “집권하자마자 숙청”

통합민주당 김효석 원내대표는 12일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가 전날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임명된 고위직 인사들의 자진 사퇴를 요구한 것과 관련해 “집권하자마자 민주평화개혁 세력을 숙청하려는 움직임으로 받아들여진다”며 “소름이 끼친다”고 비판했다.

김 원내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대명천지 민주국가에서 어떻게 권력이 언론, 문화, 학계, 시민단체까지 통제하려는 발언을 할 수 있느냐. 독재정권의 후예정당인 한나라당은 이런 발언에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우상호 대변인도 브리핑을 통해 한승수 국무총리와 이상희 국방, 유명환 외교, 김하중 통일, 이만의 환경부 장관, 김성호 국정원장 후보자 등 새 정부 고위직 인사들을 열거한 뒤 “이분들이 모두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장차관으로 활동하며 국록을 먹고 복무했던 분들인데 이분들부터 정리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은 논평을 내고 “민주당이 한나라당의 주장을 왜곡하여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한나라당은 국정실패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것이지 숙청이나 보복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나 대변인은 또 “이명박 정부의 국정철학과 가치와 맞지 않는 분들은 새 정부가 원활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며 “민주당은 더는 국정 발목잡기를 중단하라”고 말했다.

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 과거 정권 - 외국 사례

YS → DJ 임기말 인사 자제 - 요직 퇴진 ‘협조’

DJ → 盧 자리 싸움 없었지만 386 전면배치

10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뤄져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지만 법률상 임기가 보장됐다는 이유로 노무현 정부의 인사들이 정부 산하단체나 공기업 준공기업 등에서 고위직을 계속 유지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역대 정권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이한’ 현상이다.

역대 정권 가운데 일부는 장기간 집권을 했거나,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아 ‘정권교체=대폭 물갈이’ 공식이 적용됐다. 또 전 정부를 승계하는 정권이 들어설 때는 ‘자리싸움’이 별로 없었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여야가 바뀌는 정권교체인데 김영삼 정부에 이어 들어선 김대중 정부 때도 이런 현상은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김영삼 전 대통령 측 전언이다.

▽“모든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났다”=김영삼 전 대통령의 한 핵심 측근은 “당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김영삼 정부에서 고위직을 한 사람들은 스스로 모두 물러났다”면서 “김대중 정부가 정권 인수인계 과정에서 산하단체 공기업 등의 주요 자리에 대한 교체를 요구했는데 당시 우리는 모두 들어줬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주요직 인사를 아예 하지 않았다”면서 “정당정치에서 새 정부가 들어서면 과거 정부 인사들은 스스로 물러나는 게 정치 도의상 맞다”고 말했다.

실제 김대중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물갈이 인사를 단행했다. 각 정부 부처에서는 호남인맥이 급부상했고 산하단체, 공기업 등에서도 김대중 정부와 이념이 같은 인사들이 대거 발탁됐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를 승계해 전 정부와 자리를 두고 마찰을 빚지 않았다. 다만 386세대를 전면에 배치하면서 ‘코드 인사’ 논란을 불러일으킨 정도였다.

최평길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담당한 인사들은 그 시대가 지나면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면서 “전 정권의 이념과 가치를 공유했기 때문에 발탁이 됐는데 이런 사람들이 다른 이념과 가치를 갖는 정부에 남아 있는 것은 정치 도의상 맞지 않는다. 물러나서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의 사례=미국은 대통령 임명직의 경우 정권교체가 이뤄지면 자리를 비워주고 퇴진한다. 공무원의 임면을 당파적 충성이나 이념 등에 의해 결정하는 정치적 관행인 엽관제(spoils system)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정권교체 시 바뀌는 자리는 3000개 정도라고 한다. 연방정부의 차관보급 이상만 해도 380여 개 자리의 주인이 교체되는 것. 1820년에 제정된 4년 임기법(Four Years’ Law)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공직자의 임기를 대통령의 임기와 일치시켜 공무원의 운명을 정권의 진퇴와 연결시킴으로써 엽관제에 법적인 기초를 제공했다.

특히 정무직 인사 대부분은 자신이 몸담았던 학교나 연구소 등으로 돌아가 교체 과정에서 잡음도 거의 없다.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의 경우 1955년 이후 대부분 기간에 자민당이 정권을 잡았다. 총리가 수차례 바뀌었지만 자민당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바뀐 것이라 자리를 두고 큰 잡음은 없었다. 이런 구조에서 야당이 정쟁을 벌이거나 새 내각의 인사권에 개입할 여지는 없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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