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면 바뀐다’ 10년…이젠 ‘핵 포기해야 준다’로

  • 입력 2008년 1월 22일 02시 59분


코멘트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북한의 실질적인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대북정책 기조를 바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5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방문해 남북 군사회담장을 둘러보는 이 당선인.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북한의 실질적인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대북정책 기조를 바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5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방문해 남북 군사회담장을 둘러보는 이 당선인.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새 정부 대북 정책의 전략적 목표를 “지난 10년 동안 남북관계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도록 북한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정했다. 이에 따라 향후 남북관계의 근본적인 변화가 예상된다. 이 당선인은 그동안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더 잘살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거듭 천명해 왔지만 핵 문제 해결 이전의 관계에 대해서는 ‘조건부 지원’이란 수준에서 말을 아껴 왔다. 이 당선인의 대북 정책 핵심 참모들의 말을 종합하면 ‘의도된 침묵’은 북한과의 기 싸움 내지는 향후 정치적 일정을 고려한 ‘전략적 모호성’을 노린 것이다. 이 당선인이 평소 북한 및 남북관계를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 그리고 새로운 대북 정책이 과거 10년 동안의 포용정책과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 핵심 참모들의 말을 참고해 분석해 본다. 변화의 키워드는 ‘남북관계의 교정’과 ‘북한의 변화’다.》

▽북한에 끌려 다니는 남북관계는 그만=이 당선인은 당선 다음 날인 지난해 12월 20일 기자회견에서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어 실용적인 외교를 하고 남북관계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남북관계에서 실용은 무엇일까.

대북 정책 핵심 참모인 서재진 통일연구원 북한인권연구센터 소장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내용 면에서 남북관계의 실질적인 진전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무엇을 실질적인 진전으로 보는지는 대북 정책 목표의 문제로 귀결된다.

서 소장은 “성공한 체제인 남한이 일방적으로 비용을 부담하고 실패한 체제인 북한이 관계의 시작과 끝(on-and-off)을 결정하는 과거 10년의 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결국 남한이 주도하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겠다는 말이다.

또 다른 핵심 브레인인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동시에 같은 가치를 서로 주고받는 완벽한 상호주의는 아니지만 남한은 당당하게 주고 북한도 가능한 범위에서 성의를 표시하는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선인은 지난 10년 동안 쌀과 비료 지원 등 정부 차원의 인도적 지원이 재난 등에 따른 순수한 인도적 지원의 범위와 성격을 넘어섰다고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남한이 인도적으로 지원하면 북한도 국군 포로 문제 해결과 이산가족 상봉 확대 등 가능한 범위의 인도적 문제 해결로 화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의 성의 있는 자세가 없이는 올해 정부 차원의 쌀과 비료의 지원 규모가 예년의 각각 40만 t과 30만 t 이하로 축소될 가능성이 커졌다. 인도적 지원단체 등에 대한 남북협력기금의 집행 요건도 까다로워질 것으로 보인다.

▽핵 포기해야 지원=이 당선인은 이른바 ‘북한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핵심 측근들은 말했다. 북한은 미국 및 남한과의 대치 상황이 주는 안보 불안과 1990년대부터 지속된 경제난 때문에 핵의 유혹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의 대북 포용정책은 국제사회가 안보 불안과 경제난을 완화해 주면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보았지만 이 당선인은 북한이 핵을 포기해야 안보 불안과 경제난을 해결할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하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북한 및 남북관계에 대한 이 당선인의 인식은 지난 10년 대북 포용정책을 보면서 달라진 것으로 보인다. 1995년 자서전 ‘신화는 없다’를 펴낸 54세의 이 당선인에게 북한은 러시아와 중국 등 북방으로 가는 기회의 통로였다. 그는 “남북경협은 우리가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원조가 아니라 경제협력이다. 남과 북이 같이 발전하자는 것”이라고 썼다.

그러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관계자는 “지난 10년 동안 집권 세력이 여론을 무시하고 대북 지원에 ‘올인’해 남남갈등을 일으키는 과정을 보면서 북한에 끌려 다니는 남북관계에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통일부 통폐합 구상도 여기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이 당선인은 지난해 2차 남북 정상회담 및 후속회담 등이 비정상적으로 진행된 ‘북풍(北風)’ 속에서도 대선에서 유권자들이 자신을 압도적으로 지지한 것을 보며 대북 정책을 변화시켜도 되리라는 자신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새 정부가 기존 정책을 개선하는 것은 권한이 아니라 의무”라고 말했다는 것.

▽문 닫으면 답답한 건 북한=이에 대한 비판도 있다. 대북 포용을 주장하는 한 전문가는 “(새 정부의 대북 정책 방향이) 대단히 위험한 인식과 가정 아래 세워졌다”며 “당장 북한이 대화를 단절하고 김영삼 정부 시절과 같은 통미봉남(通美封南·남한과 대화하지 않고 미국과만 대화 협상하는 것) 정책을 들고 나오면 큰 위기가 올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나 이 당선인 측은 기본 가정부터 다르다. 서 소장은 “포용정책의 성공에 따라 북한의 대남 의존이 강화돼 이제 북한은 남한의 정책에 끌려올 수밖에 없으며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의무도 지연할 수는 있지만 과거로 회귀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선인은 “북한이 문을 닫고 교류를 하지 않으면 답답한 것은 북한이지 남한이 아니다”라며 “지도자가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인민들은 영원히 가난하게 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北 한달째 침묵… 일단 지켜보자?

南과 관계 어긋날 땐 경제난 심화 우려한듯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대북 정책이 윤곽을 잡아가고 있지만 북한은 이 당선인에 대해 이렇다 할 반응이나 평가를 나타내지 않고 있다.

북한은 올해 신년사에서 남한의 새 정부가 지난해 2차 남북 정상회담에 따른 10·4선언 등 합의사항을 이행할 것을 간접적으로 촉구했다. 그러나 당선 후 한 달이 넘은 21일까지 노동신문 등 공식 매체를 통해 ‘이명박 당선인’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과거 남한 정부 출범 전에 이런저런 판단과 위협을 밝혔던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침묵이라며 그 의미를 잘 읽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동용승 삼성경제연구소 경제안보팀장은 “정권이 바뀐 남한이 지난 10년처럼 퍼주기만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북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며 “서로 파악하고 적응하는 시기가 길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한의 처지에서 보면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의 사의 표명이나 통일부 통폐합 논의, 10·4선언 합의사항 재검토 등 너무 많은 부정적 시그널이 갔다”며 “북한이 조만간 관망에서 관계 단절의 초기 단계로 이행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핵 포기 2단계 이행에 따른 6자회담 참가국의 지원이 늦어지는 데다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도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남한과의 관계가 어긋날 경우 경제난에 봉착할 수 있다는 현실적 판단 때문에 일단 침묵하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李당선인 대선이후 남북관계 발언

‘핵’ 26차례 언급 가장 많아

‘대북지원’은 3차례에 그쳐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해 12월 19일 당선 이후 모두 다섯 차례의 공식 기자회견 및 방송사 대담을 했다.

이 당선인은 다음 달 25일 대통령 취임식 및 4월 총선 등 중요한 일정들을 앞두고 북한을 직접 자극하기보다는 의중을 ‘행간’에 녹이는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새로운 대북정책의 기조를 피력했다.

이 당선인이 사용한 단어와 맥락 등을 정밀 분석한 결과 북한 문제 해결을 위한 강압(채찍)을 회유(당근)보다 강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당선인은 ‘핵’이라는 단어를 26차례로 가장 많이 사용하며 ‘한미동맹 강화를 통한 핵 문제 해결’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그러나 북한이 기대하는 대북 지원은 3차례, 지난해 2차 정상회담에 따른 10·4선언의 이행은 단 한 차례 언급하는 데 그쳤다. 그 대신 평화(11차례), 교류협력(10차례) 등 추상적인 가치를 원론적으로 언급했다.

북한을 지원하겠다고 한 부분에는 조건이 달렸다. 14일 신년 회견에서 “재정, 국민적 합의, 타당성 등을 조건으로 이행하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고위 관계자는 “사실상 앞으로 모든 지원은 조건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 당선인은 인도적 지원과 ‘본격적인 지원’을 구분했다. 또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진정한 대화’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는 지난 10년에 대한 비판이자 새 대북정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핵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본격적인 지원은 없으며 과거 두 차례 정상회담은 진정한 대화로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특히 남북 간의 신뢰를 10차례나 강조한 것은 북한과, 북한이 끌고 다닌 지난 10년 동안의 남북관계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반어적으로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