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태효]자주외교, 목표 아닌 수단이다

  • 입력 2006년 5월 8일 03시 01분


코멘트
3일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평통 미주지역 자문회의에서 인사말을 통해 한국도 이제는 클 만큼 컸으니 계속 미국에 기대서 살기보다는 독자적 진로를 선택하면서 미국과 다정한 친구로 지내는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같은 날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관훈클럽 토론회의 기조연설에서 북한에 대한 체제 변동 시도에 명백히 반대하며, 북한문제는 남북 정상이 만나 통이 큰 결단을 내리면 풀릴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했다.

한국 외교와 대북정책의 최고 책임자들에게서 나온 두 견해는 자주외교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앞으로는 한국 안보의 좀 더 많은 부분을 한국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한국의 자주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또 북한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압박 외교에 가담하여 공연히 남북관계에 분란을 일으키는 대신, 서로를 잘 알고 뜻이 통하는 같은 민족끼리 남북 화해와 통일의 길을 자주적으로 열어 가자는 취지일 것이다.

자주외교는 주어진 자국의 국력과 대외 관계 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의 외교 목표를 주도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과제일 따름이다. 국가의 역량이 자라나면 자주성도 함께 증가해야 한다는 소신은 옳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범하고 있는 결정적인 오류는 외교의 수단적 측면인 자주성을 한국 외교의 목표 그 자체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주외교의 달성도를 외교의 성공 지표로 간주하다 보니 한국의 안보, 선진화, 통일과 같은 중대한 목표들이 부차적인 문제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한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입만 열면 자주외교를 강조하다 보니 한미 간 불평등 관계의 극복을 시대적 사명으로 여기는 국민이 많아졌다. 지구상에서 현재 자주외교를 제대로 펼 수 있는 나라는 엄밀히 말해 미국 하나뿐이다. 한국이 서둘러 전시작전권을 받아오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통제하는 위치에 선다고 자주외교가 실현되지는 않는다. 자주외교에 필요한 역량과 주변 안보환경을 먼저 구비해 놓지 않고 자주만 서둘러 추구하면 우리의 경제적 부담만 늘고 한미 간 불신은 가중될 공산이 크다. 또한 북한 체제의 변화를 꾀하지 않고 남북 간 타협만으로 얻으려는 한반도의 평화는 자주적인 평화가 아니라 취약하고 한시적인 평화에 불과하다.

외교에 있어 자주는 분명 선(善)이지만 그 자체로서 목적시될 때 커다란 위험성을 내포한다. 본연의 외교 목표와 이익을 훼손해 가면서까지 자주를 추구할 경우 한국 외교의 자주성은 오히려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러한 논리의 전도(顚倒)를 올바로 깨닫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자주성’에 호소하는 감성 외교를 폄으로써 또 다른 정치적 목적을 겨냥하고 있는 것인지는 판단키 어렵다.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이 정부가 표방하는 자주외교의 주술에 빠져 맹목적인 자주의 외침만 부르짖는 가운데 한국 외교가 가야 할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자주외교는 홀로 떨어져 나와 살겠다는 외톨이 외교와는 다르다. 자주를 얻으려면 더욱더 국제사회의 중심부에 파고 들어가야 한다. 한국이 원하는 바를 남들도 이해하고 돕게 만들려면 이를 국제사회의 보편적 규범에 부합하게 추진해야 한다. 그리하여 국제평화에 대한 한국의 역할과 책임이 커질수록 자주성 역시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평택에 들어설 주한미군 기지를 마치 한국을 동북아시아의 분쟁에 끌고 들어가는 족쇄로만 간주한 채, 한국의 안보 시야와 책임을 여전히 한반도의 굴레에 묶어 두는 피동적인 사고로 어떻게 자주성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최악의 인권 탄압국가인 북한의 정권을 살리는 데 매진하는 외교로 어떻게 보편타당한 외교를 외칠 수 있겠는가.

나라의 역량을 결집하여 힘을 기르는 데 매진해야 할 때에, 자주 구호만 선동적으로 외치는 자들은 자칭 애국자일지 모르나 냉정히 본다면 국가의 발전에 암적인 존재들이라 단언할 수 있다. 한국의 자주외교는 단지 한국의 외교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적인 존재여야 한다. 진정한 자주외교를 위해서라도 이제는 자주외교라는 말을 가려 쓰도록 하자.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국제정치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